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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

나는 글을 좋아하는가

단상

by 김성호

균열이 눈길을 붙드는 때가 있다. 그로부터 평소라면 일지 않았을 파문이 일어난다. 균열이 쓸모를 얻는 때가 꼭 그러하다.


출판공동체 '편않'의 지다율님과 만났다. 기자를 막 그만두었을 적 그가 운영하는 공동체 '오도카니'에서 강연을 하며 연을 텄었다. 오늘보니 그는 책을 여러권 낸 출판인이 되어 있었다. 만나자마다 그가 건넨 책들을 나는 가까이 지내는 이의 책장에서 본 일이 있었다. 그 친구가 읽는 책이라면 제법 괜찮은 구석이 있을 터였다. 우리가 다시 만나기까지 지다율 대표는 여러 권의 책을 태어나게 했다. 그간 나는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니 조금쯤 민망해졌다.


편않은 기성 출판계에 균열을 내는 게 목표라 했다. 나는 들어선 식당의 깨진 창문을 가리켰다. 저런 균열이라면 제법 멋지겠군요. 삶은 그렇게 우연과 필연을 맞닿게 하는 것이다.


기다림 끝에 두 자리가 났다. 그는 구석진 자리가 좋다고 했다. 쓸만한 변혁은 언제고 변방에서 일어나죠. 그가 동의를 표했다. 영정은 관서에서 천하를 도모했고 유방은 잔도를 타고 파촉까지 들어섰다. 내가 존경한 이 여럿이 그처럼 업을 일으켰다. 변방에서 천하를,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이를 나는 애정할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철학에 제법 관심이 있다고 했다. 한 때는 철학을 좇아 적을 지방캠퍼스로 옮길까도 했다고. 그에게 설기현의 피가 흐른단 걸 그렇게 알았다. 설바우두는 이탈리아전 동점골의 주인공이 됐다. 별 쓸모가 없어진 이 낡은 학문이 어쩌면 인간을 구하게될런지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식당을 나서는 길에 그가 날씨 얘기를 했다. 영 겨울 같지 않다고, 제 철 답지 않다는 것이다. 철학을 아는 분답게 날씨의 철없음도 알아보는군요. 빵 터진 그를 보며 어깨가 으쓱하였다. 아재 둘이 나란히 경의선 철길을 걸었다. 옛 철길 따라 오가는 사람들을, 다시 차가 다니게 된 연세로를 이야기했다. 선 곳에 따라 달리 보이는 풍경을, 같은 문제를 다르게 보는 인식에 대해서도 말했다. 나는 단절이라 하는 것을 시장님은 연결이라 할 것이다. 내가 연결이라 하는 것을 그는 단절이라 할 것이다. 설득이 무용할 인식의 격차를 우리는 어떻게 좁혀갈 수 있을까.


책 몇권을 들고서 극장으로 향한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바타 2>를 볼 것이다. 지다율 대표는 <슬램덩크>를 보았다 했다. 극장에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나의 개그에 빵터지고 만화보며 우는 인간, 역시 그렇고 그런 아재구나 싶었다. 그 어디선가 소연이 백호에게 물었을 테다. 농구 좋아하세요? 그러면 백호는 농구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삶을 통째로 내걸고서 제가 농구를 좋아한단 걸 입증하려 들 것이다. 모든 사내의 운명이 그와 같다. 사내라면 마땅히 제가 좋아하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


나는 글을 좋아하는가.



2023. 1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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