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책은 에세이 매대엔 없더라 하여 강남까지 나간 김에 서점에 가보았다. 사실 책이 나오면 한달음에 서점까지 가보아야 하는 것인데, 이리 뒤늦게야 찾게된 건 어지간히 게으른 탓이기도 하고. 무튼 나보다 내 책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이 많다는 건 감사한 일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 말론 에세이 매대에 놓여야 더 많이 팔리는 것이라는데 요즈음 에세이가 딱 별로인 나는 굳이 그런 생각까진 하지 않는다. 모든 글엔 저마다의 책무가 있고 좋은 글이란 스스로 제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저 내가 그런 글을 써냈는가를 의심하며 따져볼 뿐이다.
무튼 도착한 서점에는 정말 내 책이 보이지가 않는다. 검색을 해보니 인문서적 코너에 놓여 있는 것인데 내가 쓴 에세이가 어째서 인문으로 구분된 건지 조금은 황당한 기분이다. 학위는 없어도 지식은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깊은 글을 써도 되지 않았나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쉽게 쓰자고 가볍게 쓰자고 그렇게 마음을 먹어놓고도 충분히 가벼워지지 못한 나의 글이 마침내는 제 자리도 얻지 못했구나 싶어 민망해진다.
인문 매대 앞에 서서도 한 눈에 찾지 못하였다. 다른 책은 너덧권씩 있는데 내 책만 한 권이어서 저기 깊이 파묻혀 보이지 않은 탓이다. 아무리 안 나가도 두어권쯤은 쌓아주지 싶었다가 혹시나 누가 몇권을 사가서 한 권만 남은 건지 모른다고 행복회로를 돌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매대를 가만히 보니 딱 두 권 남은 책 제목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주해>가 아닌가. 그렇다면 내 책도 팔려나간 건 아닐테지. 하하.
한국의 빻은 교육은 칸트에 대하여 정언명령이란 개념과 함께 개꼰대적 이미지만 입혀 놓았다. 물론 그에게 꼰대적 기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꼰대일 수는 없다. 그는 일생에 걸쳐 도전자였고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시골마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두뇌도 육체도 변변찮았던 그가 기댈 건 남다른 성실함과 고집스러움 뿐이었다. 마흔을 넘겨 겨우 교수직을 얻었고 일생 제대로 된 예술이며 문화를 접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철학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책을 써냈던 것이다.
그의 3비판서 중 첫째는 <순수이성비판>이다. 이 책을 요약하면 우린 뭘 알 수 있는가 쯤이 될 거고 두 번째 낸 <실천이성비판>은 우린 뭘 해야 하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처음엔 하나로 구상됐던 이 책들은 그 방대한 분량과 지향의 차이로 두 권으로 나눠졌던 것인데 칸트는 이 저작에 대해 제법 큰 기대를 가졌던 듯 하다.
<순수이성비판>을 내고 그는 제가 걸작을 썼다고 여겼다.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가 글 깨나 읽는 이들이 이 책을 두고 이런저런 찬사를 내놓을 거라 생각했을 테다. 그런데 책은 영 나가지 않았고 일 년이 지나도록 겨우 악평 하나가 발표된 게 고작이었다. 그 칸트가 이를 두고 오랫동안 괴로워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로부터 몇 권의 책을 더 낸 뒤 도달한 게 저 명저 <실천이성비판>이다. 읽으면 읽을 수록 읽는 이의 한계만을 깨우치게 되는 이 책에 대하여 수많은 명성 높은 학자들이 주해를 붙여 소개해왔다. 그러나 나는 어김없이 일류 셰르파를 데리고도 안나푸르나에 오르지 못하는 하찮은 등산객의 기분만을 맛봤을 뿐이다.
칸트 곁엔 쇼펜하우어의 책이 놓였다. 칸트에 비한다면 훨씬 잘 나가는 모양인지 매대에 가장 높이 선 이 책이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세상은 그를 비관론자로 이해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행복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다. 남보다 치열해서 세상은 그를 염세주의자라 하였다. 집안을 버려두고 오로지 제 일만 돌봤던 형편없는 어머니 아래 자라난 그가 고작 서른 하나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썼다. 이 책은 수십년이 지나 고서점을 떠돌다 제 인연을 만나기까지 완벽한 실패작이란 오명을 썼다. 그 모든 시련을 겪고서도 쇼펜하우어는 부단한 자기극복과 명랑함을 강조하지 않았나.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명랑함을 잃으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불행해진다고. 삶이 불행에 빠지면 살기 싫어지는 법이라고. 삶은 그 순간 위기에 처한다고. 그가 육십이 넘어 내놓은 <인생론>은 시대를 건너와 우리에게 살아갈 마음을 전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칸트와 쇼펜하우어 앞에서 오늘 내가 겪는 괴로움이란 얼마나 사소한가 말이다. 얼마나 시시한가 말이다. 얼마나 하찮은가 말이다. 저기 에세이들 사이가 아니라 이들 곁에 내 책을 놓아준 이가 고마웠다. 책을 쓰길 참 잘했다.
2023. 1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