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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

취하면

단상

by 김성호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뤄지지 않는 욕망이 거기 있으므로


붉은 신발을 신는 일과 그 신발을 신고 만나는 이와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노래하는 아이조각과 내가 맡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향과 그 모두를 추억하는 자리와 손을 잡고 거니는 길과 그러다 문득 서서 바라본 돌로 쌓은 담과 그 곁에 난 오솔길과 길 끝에 자리한 아주 굵은 나무를 나는 어느덧 그 모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이가 되어 아무데서나 이를테면 한강 위를 달리는 지하철 위라거나 손님 이제 영업 끝났습니다 흔들어 깨우는 술집 안이라거나 잔뜩 취해 달리는 심야버스 뒷자리나 이발사 사각대는 낡은 이용원 의자나 화려한 이 찾지 않을 온갖 쓸쓸한 자리에서 마침내 만나고야 마는 것이다


나는 겨우내 앉은 자리 그대로 고꾸라진 이 미터는 족히 되는 독수리가 가느다란 뼈를 드러내던 그 볕들던 날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이 세상의 자비가 말하자면 떠난 것이 떠나가고 남은 것이 썩어가길 고대한다


어느 가슴은 좁고 조악하여 오로지 저만이 세상에서 가장 강건하다 외치는 법


그러나 그것이 가벼운 두드림에도 와장창 깨어나간다는 걸 이제는 알지


나는 또 안다

취하면 외로워진다는 걸

사랑하면 슬퍼진다는 걸

잠들면 꿈을 꾼다는 걸

그조차 잊힌다는 걸


한껏 취하여 돌아온 자리에서 나는 다시 과분한 술병 뚜껑을 열고 오늘은 꼭 마지막으로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달라고 부탁하고 잠들어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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