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잃었다... "끝까지 가겠다"고 결심했다
권대희 사건
이나금씨는 이제 노후만 준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쉰여섯이었다. 막내 대희까지 막 대학에 간 참이었다.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첫째는 서울대에, 둘째는 경희대학교에 보냈다. 대구에서 아들 둘 모두를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보낸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회사일도 집안일도 야무지게 잘 해내는 성격이 빛을 발했구나 싶었다.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환갑이 넘을 때쯤이면 아들 둘 모두 취업을 해서 걱정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알아서 잘 크는 아이들이 그렇게도 고마웠다.
하늘처럼 생각했던 아들들이었다. 그 하늘 반쪽이 한순간에 떨어졌다. 첫째 연락을 받고 뛰어간 병원 침대에 둘째가 피투성이가 돼 누워있었다. 아이구야. 무슨 일인지. 실감할 수가 없었다.
대희는 49일 동안 버티다 갔다. 그렇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딸 같은 아들이었다. ‘엄마 힘드냐’고 ‘잘 지내고 있느냐’고 조잘대던 막내였다. 그 막내가 눈도 떠보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조차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 사고가 나고 빨리 자료를 받아둔 게 다행한 일이다. 사고 이틀 뒤 병원에 가서 의무기록지와 CCTV를 받았다. 혹시나 주지 않을까 해서 어수룩한 연기까지 했다. 그때만 해도 준비해두자는 생각이었지 소송을 갈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우선 아이부터 살리자 싶어 의무기록지를 들고 이 병원 저 병원 수소문해 다녔다. 온 정신이 거기에만 가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도 병원도 깨어날 줄 알았는데 아닐 수 있겠다 서로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집도의와 마취과 의사, 초짜 의사를 모두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집도의는 마취과 의사가 환자관리를 못했다고 했다. 그 얘기를 전하니 마취과 의사가 충격적인 얘기를 털어놨다. 대희 하나면 문제가 없었는데 다른 환자들을 더 수술했다고, 그래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집도의사와 3자대면을 시켜달라고까지 했다.
다시 며칠이 지나니 입장이 또 바뀌었다. 집도의가 아니라 수술을 이어받은 그림자의사 잘못이 크다고 했다. 경험이 부족해서 실수를 한 거라고 했다. 전원해간 중앙대학교 병원이 조치를 잘못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주장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림자의사는 상을 다 치를 때까지 병원에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질 않았다. 얼마 뒤 그림자의사 카톡프로필엔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올라왔다. '우리 가족은 이제 막 상복을 벗었는데'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대희가 끝내 죽고 나서도 소송을 할 생각을 못했다. 소송을 가려면 수술실CCTV 영상을 봐야 하는데, 아이가 죽어간 영상을 열어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 하나 없는 수술대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무서웠고, 그 모습을 보게 될 제 모습이 무서웠다고 했다.
이나금씨가 병원과 소송전을 벌인 건 상을 치른 이후 병원의 태도 때문이었다. 집도의인 장모 원장은 이씨에게 “감방에 갈 일이 있다면 가겠다”고 했다. 이씨는 “‘감방’이란 말을 다섯 번이나 했다”고 생생히 기억한다.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던지 그날 끝까지 가보기로 결심을 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말뿐인 사과 뿐,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기세가 그대로 느껴졌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