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_#06. 관리하려다 관리당하다

어느새 나는 투두리스트의 하청업체

by 골골


눈 뜨기도 전에 울리는 알람, 숨을 고르기도 전에 시작되는 루틴. 햇빛이 채 들기도 전에 도시는 이미 달아오른다. 커피 향이 퍼지기도 전에 다이어리 위엔 오늘의 계획이 빽빽하다. 자산, 피부, 감정, 인간관계까지, 삶의 모든 면이 ‘관리’의 품목이 되었다. 우리는 무한한 성장의 구호 아래, 잠시라도 멈추면 뒤처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투두리스트는 늘어만 가는데 정작 버킷리스트는 줄어든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버전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를 초 단위로 쪼갠다. 그렇게 자신을 돌볼수록 더 깊이 소모되어 가는 역설을 매일 마주한다.


한때 빈틈없는 관리만이 삶의 미덕이라 믿었다. 완벽함이라는 환상 아래 숨 쉴 틈 없는 일정을 자랑처럼 여겼고, 주말 아침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앉아 있는 순간조차 죄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움직임이 곧 존재의 증명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우연히, 모든 계획이 멈춰버린 오후를 맞았다. 급한 마감도, 다음 약속도, 닦달하듯 울리던 알람도 없는 시간. 서서히 식어가는 커피잔을 바라보고 있을 때, 구름에 가려졌던 햇빛이 살며시 나와 잔을 비췄다. 그 빛을 따라 아주 느리게 흔들리는 먼지들이 보였다. 그 아주 사소한 움직임들이 그날따라 지나치게 또렷했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바쁘게 움직일 때 느껴지던 공허함이, 멈춰 서자 비로소 채워지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멈춰서는 것이 두렵기만 했던 시간이, 그날은 자유처럼 다가왔다. 목적 없는 멍 때리기, 결론 없는 수다, 의미가 없어 보이는 행위들. 지금까지 '비효율적'이라 치부했던 모든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알았다. 무엇이든 조금 비어 있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채움이 가져올 하중을 견뎌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었다.


강 위의 다리를 보면 블록과 블록 사이에 '신축이음(Expansion Joint)'이라 불리는 틈이 있다. 온도 변화와 차량 통행의 진동에 따라 구조물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남겨둔 여유다. 겉으론 불필요해 보이지만, 그 틈이 없다면 다리는 수축과 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균열이 간다. 우리는 이 구조적인 틈을 '비효율'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버티기 위한 필수 조건, 즉 '구조적 안정성'이라고 부른다. 숨 쉴 여유를 가진 다리가 더 오래 견디듯, 삶도 그렇다. 흠 없이 메워진 일정표보다, 약간의 허술함과 공백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하루가 이어진다. 그 틈을 지키며 살아보고 싶었다. 애써 메우지 않는 자리, 일부러 남겨두는 여백, 무너짐을 완충하는 작은 공간을 갖고 싶어졌다.


우리는 앞으로도 몸과 마음을 관리하고, 일정들을 조율하며 살아갈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한쪽으로만 기울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은 돌아봐야 한다. 한쪽이 마르면 다른 한쪽은 메말라갈 테니.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삶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신호일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투두리스트를 펼친다. 가장 위에 이렇게 적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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