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_#08. 나는 이렇게 포기합니다

사실은 생존 전문가

by 골골


포기하다ㅣ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어를 ‘끝’과 나란히 떠올린다. 어떤 관계나 시도, 노력에 붙는 마지막 문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겪어온 포기는 그런 선명한 마침표와 거리가 멀었다. 결심이라기보다, 오래전부터 낮은 곳을 향해 움직여 온 마음의 각도였다.


내가 경험한 포기는 뜨거운 감정 뒤에 오지 않았다. 드라마 속처럼 감정이 폭발하거나 바닥을 치는 장면 없이, 마음속 소음이 하나둘 줄어들 때쯤 조용히 도착했다. 더 하고자 했던 마음의 온도는 어느 순간 식어 있었고, 이유를 설명할 말도 찾기 어려웠다. 분명 한동안 붙잡고 있었던 일인데도, 그 열기가 줄어드는 흐름은 너무 미세해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폭발이 아니라 소멸, 그것이 내게 가장 가까운 포기의 모습이었다.


또한 선언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만두겠다’고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붙잡고 있던 힘이 어느 순간 자연스레 빠져나가곤 했다. 주변에서 보기엔 멀쩡해 보였겠지만 마음은 이미 낮은 곳으로 이동해 있었고, 그 자리에서 바라본 일상은 흐릿하게 바래 있었다. 바라지 않으면 좌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탓인지, 기대를 줄이는 일은 마음을 보호해 주었지만 동시에 욕망의 근육을 서서히 닳게 했다. 어느새 나는 애쓰는 쪽보다 덜 아픈 쪽을 고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책망하던 시절이 있었다. 조금 더 버텼어야 했던 건 아닐까, 더 해볼 수도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포기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작동한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래 들고 갈수록 손상을 남기는 무게들이 있다. 그럴 때 포기는 그 손상을 미연에 줄이기 위해 마음이 스스로 내리는 조정이었다. 더 아프지 않기 위해, 남은 힘을 지키기 위해 마음이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생존의 기술이었다. 포기는 나약함도, 패배도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완충의 동작이었다.


내가 본 포기는 끝이라기엔 너무 조용했고, 시작이라기엔 아직 차가웠다. 어쩌면 포기는 끝을 향한 동작이 아니라,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경계선을 드러내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멈춰야만 신발끈을 다시 묶을 수 있듯, 포기는 내게 잠시 머무르는 정리였다. 생존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기에 다시 생존이 가능한 것 아닐까. 버티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마음은 생각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포기란 무엇일까. 여전히 뚜렷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의 나는 포기를 더 이상 좌절의 단어로 보지 않는다. 포기는 다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마음의 그림자이자 조용한 숨고르기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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