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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Apr 05. 2021

14살, 인생의 첫 번째 예언을 듣다

미용실 누나 잘 지내시죠? 인생은 어떻던가요?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트콤에서 어린 남자, 여자 아이가 목욕탕에서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면 나는 웃지 못한다. 내 이야기를 누가 제보라도 한 듯이 시트콤에서 나오는 것이고, 7살 목욕탕에서 유치원 동창을 만난 이후로 나의 목욕탕 길은 여탕이 아닌 남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아빠를 따라 이발소를 가기보다는 엄마를 따라 미용실을 가는 어린이였다.

14살. 그날의 예언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어릴 적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나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고, 확인할 길이 없어서 말하는 허풍이라 치고 이해해주기 바란다.


앞선 허풍을 이어서) 준수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혼자서는 이성이 많은 곳에 머무는 것이 다소 떨리기도 했기에,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미용실은 항상 엄마와 함께 가는 장소였고 되도록이면 손님이 많이 없는 시간을 선호했다.


그날도 미용실 누나와 사장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재빨리 머리카락을 깎기 위해 '늘 하던 대로'의 주문을 엄마에게 말하고 그대로 미용사 누나에게 전해주길 바랬다

7살 목욕탕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옷을 입고 있는 미용실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성을 만나기 싫었던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야 개인생활을 중요시해서 프라이버시 질문을 하진 않지만, 어릴 적 우리네의 분위기는 사소한 개인생활을 물어보고 답하는 것이 친해지고 관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특히나, 어린이였던 나는 어른들의 쉬운 표적이었고, 쉴 틈 없는 (지금 생각해보면 개인적인) 질문들이 날아들어왔었다.


- 아이고, 귀엽게 생겼네?
(미안하다. 오래된 이야기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이런 뉘앙스였다.)
- 여자 친구는 있어?
- 아니요.
- 공부는 잘하고?
-... (공부를 못해서 대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보통이라서 침묵한 거였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게 공부에 대해 물어서 내가 소심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미용실 누나는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비스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가능한 센스가 아니었나 싶다.


- 이제 나이가 몇 살이야?


- 이제 중학교 올라가요. 14살 될 거예요.


그리고, 미용실 누나의 한마디는 내가 평생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경고이자, 예언'의 말이 되었다.


아이고, 이제 고생길이 훤하네, 고생길 시작됐네

그때 당시는, '공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줄 알았지만,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저 한마디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트라우마라는 표현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시험 점수가 낮아 우울한 날,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날,

군대 입대하던 날,

원하는 곳에 취업하지 못한 날,

로또에 될 거라 좋은 꿈을 꿨음에도 되지 않은 날,

친구랑 다툰 날,

운수 없는 날 등등


이런 날들마다 그 미용실 누나의 말이 떠 올랐다.







어쩌면, 미용실 누나의 말을 방패 삼아,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원인과 얻은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이유를 남에게 돌리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저 말을 마치 '당연한 예언'인 마냥 붙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저 말이 미용실 누나의 '예언'이 아니라, 이것이 '현실'임을 인정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훌훌 털고 인정하려 한다.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 인생이 그런 것임을.



미용실 누나, 누나 말이 맞았어요.
그날 이후로, 인생이란 쓴맛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요, 누나가 말해주지 않은 것도 있었어요.
인생이요, 쓴맛도 있지만, 단맛도 많아서 즐겨볼 만하더라고요.



지금은 아마 환갑은 넘었을 미용실 누나,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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