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신문이 이어준 인연

by 내우주

반가운 전화를 받았습니다. 느리지만 또렷하게 저에 대해 묻는 목소리에서 오랜 기억 속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통화 상대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저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이셨던 신 선생님이었습니다. 헤아려 보니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된 것은 무려 30년 만이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예산 지역신문인 '무한정보'에 연재 중인 로컬콘텐츠에 관한 제 칼럼을 읽고 연락을 주셨던 겁니다.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어린 제자의 얼굴을 기억해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뭉클하던지요.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이미 은퇴를 앞두고 계셨던 선생님은 이제 아흔의 나이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기억 속의 선생님은 힘 있는 목소리와 당당한 풍채의 ‘호랑이 선생님’이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뵈니 많이 왜소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때의 그 온화한 미소와 말투가 그대로여서 얼마나 반갑고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우리는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 마주 앉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직접 농사를 짓고 계신 산자락 아래 조용한 밭두둑 옆에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누군가가 보면 평범한 시골 풍경이겠지만, 저에겐 그 무엇보다도 특별하고도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서로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왔다는 말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저는 고로컬에서 제작한 시그니처 ‘YESAN’ 티셔츠를 꺼내 선생님께 입혀드렸고, 선생님은 멋진 붓글씨로 정성스레 써내려간 한 장의 종이를 건네주셨습니다. 인일시지분 면백일지우(忍一時之忿 免百日之憂). “한 순간의 분노를 다스리면 백 날의 근심을 면한다”는 뜻이지요.


선생님은 이 글귀와 함께 참을성 없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내와 사려 깊은 태도가 왜 중요한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공부는 책 속에서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만들고 운영하는 제게 꼭 필요한 격언이었어요.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타인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예산에 정착해 지역 고유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 이야기를 문화예술 콘텐츠로 풀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과 기억을 잇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이 칼럼을 연재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기억될 만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한평생 지역의 교육 현장에서 헌신하며 제자들의 올바른 길을 응원했을 선생님을 뵙고나니 제가 하고 있는 일과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오래된 골목을 걷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혹시 누군가 이 칼럼을 읽고 잊고 지내던 얼굴을 떠올리거나, 오래된 만남을 다시금 꺼내 본다면 어떨까요?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의 조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이 연결되지 않을까요? 작은 칼럼 지면이 지역과 사람을 잇는 다리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향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선생님과의 재회는 제가 왜 여기에 있고,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대해야 하는지 다시 확인시켜 준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


다음엔 또 어떤 이야기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고향은 그렇게, 늘 뜻밖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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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주고받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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