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원도심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공간은 ‘텅 빈 곳’ 아닌 ‘시간의 통로’

by 내우주

예산 원도심에 가면 ‘추사사랑체’로 통일된 상가 간판 디자인이 눈에 띕니다. 예산군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체인 ‘추사체’를 한글 폰트로 제작해 무료 배포하고 있는 글꼴입니다. 저는 배낭여행을 참 좋아하는데요. 전 세계 어느 도시를 가 봐도 예산처럼 지역의 문화자원을 공공디자인에 접목한 격조 높은 도시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도심 여행 거점인 ‘로컬안내소 고로컬’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가장 먼저 간판 자랑부터 늘어놓곤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죠. 추사체로 통일된 간판에 집중된 방문객들의 시선에 호기심이 묻어나는 게 느껴집니다. 간판에 머문 시선은 320m 길이의 ‘추사의 거리’로 이어집니다. 이 거리는 예산군이 추사를 기리기 위해 예산로194번길에 조성한 테마 거리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곳 읍내는 옷도 사고, 햄버거도 사먹고, 스티커 사진도 찍으러 오던 활기 넘치는 번화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공실일 정도로 침체한 상권이 되었습니다. 제가 예산에 내려와서 가장 먼저 기획한 일 중 하나는 이러한 골목을 탐방하는 원도심 워킹 투어 프로그램입니다.


텅 빈 원도심에서 무슨 워킹 투어냐고요? 공간(空間)의 공은 ‘텅 빈 곳’이란 뜻의 빌 공(空)을 씁니다. 하지만 저는 공간을 ‘이야기를 연결하는 문(門)’이라고 생각합니다. 겉보기엔 초라하고 방치된 공간일지라도,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통로가 바로 공간인 셈입니다. 원도심에서 방문객들은 예산의 역사에 도킹(Docking)하며 반전의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1922년 준공된 호서은행 본점 건물은 원도심 여행의 핵심입니다. 1시간 남짓 진행되는 워킹 투어에서 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공간입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1938년 덕수궁 미술관을 준공하기 훨씬 이전에 설계한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 또한 크기 때문입니다.


1930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현상 선생이 이곳에서 독립운동자금을 탈취한 사건이 있었고, 1949년에는 윤봉길 의사 열사비 제막식이 이 건물 앞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과 윤 의사의 유족이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지 않는다면 분명 모르고 지나칠 공간입니다. 관심의 정도가 여행의 깊이를 좌우합니다. 제가 원도심 워킹 투어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가장 많이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예산의 과거로부터 시작된 여행은 본정통(本町通)으로 이어집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를 따라 예산의 현재로 넘어와, 최근 외국인 방문객들의 성지가 된 BTS 진의 양조장 ‘지니스램프’로 도킹합니다. 이곳에서 원도심의 변화상을 함께 살펴보고, 예산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질문을 던집니다. 앞으로 예산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요? 오래된 골목을 따라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예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매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향에 내려와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예산을 떠나며 더 이상 즐길 거리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제 기억 속 활력 넘쳤던 ‘명동 골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곳에 축적된 사람들의 추억과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예산이 ‘노잼 도시’로 인식되는 것을 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공간에 깃든 이야기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산을 다녀가며, “예산은 정말 즐길 거리가 산더미야!”라고 말하게 되는 로컬 콘텐츠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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