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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Sep 07. 2024

미친놈이 되고 있었다.

내 마음과 정신에 피멍이 들었다..

“뭐라고요?”  

청순해 보이는 상담사는 내게 물었다.  

“상담받고 싶어서 왔어요. 저는 배터리 사업부 테스트 그룹 고철수 사원이라고 해요.”  

일단 대충 자기소개를 했다.  

“아…. 그러시군요. 저는 이곳 마음산책 명세빈 상담사라고 해요. 오신 김에 지금 얘기할까요? 원래는 정식 오픈하고 예약제로 운영하려고 하는데 그 부분은 다시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는 방어적인 자세를 내려놓고 친절하게 안내해 줬다.  

“차 한잔 하며 얘기 나눌까요? 여기 다양한 차를 갖춰두었어요. 고르시면 제가 만들어드릴게요.”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녀의 미소가 7년간의 회사 생활로 고단해진 만성 피로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미소가 조금은 어색했지만, 인공적인 미소가 아니고 자연인의 미소였다. 회사 사람의 미소가 아니었고 일반인의 미소였다. 하늘의 구름이 흘러가듯,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얼굴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편안함이었다.




상담실은 따뜻했다. 온도가 따뜻했다는 것은 아니고 분위기가 따뜻했다. 연한 갈색 패브릭 소파, 진한 갈색 원목 테이블, 그 밖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장, 책상과 창밖에 운동장이 보이는 경치는 내게 따뜻함을 주었다. 어두컴컴하고 쥐가 나왔던 T1 공장의 사무실과는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창밖을 자세히 보니 운동장 주변으로는 나무가 우거져있다. 귀를 기울이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축구장에는 여러 사람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취미로 운동 겸 축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뛰고 있을까. 그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을 위해서 뛰는 것으로 보인다. 문득 회사 생활도 즐거움을 겸해서 생활할 수 없을지 궁금했다. 회사 생활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찾아서 할 수는 없을지 궁금하다.  

“창밖을 보고 계시는군요.”  

“아…. 네 사무실은 창밖을 보기 어려운 구조라서요. 회사에서 이런 경치를 본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그러시군요. 상담실의 위치와 경치가 좋죠. 저도 여기 오픈하고 오자마자 장소가 마음에 들었어요. 여기 우롱차 만들어왔어요. 자리에 앉으시죠.”  

“아…. 네 감사합니다. 어디에 앉을까요?”  

“편하신 곳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네 그렇다면 여기로….”  

난 벽 쪽으로 앉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등 뒤가 공간이 있는 것보다는 벽이 있는 것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사무실에서는 등 뒤가 늘 공간이 있어서 누군가 본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결국 차라리 벽이 있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 그쪽 자리를 선호하시죠.”  

“벌써 심리 테스트 시작된 것인가요?”  

“아니에요. 하하.”  

생각보다 어색해하는 상담사를 내가 가벼운 말로 풀어줬다. 그녀는 다른 상담 센터에서 1년 정도 짧게 근무하다가 이곳 금성전자에 상담실을 만들고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상담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실무 경험으로는 이제 갓 2년 차 남짓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내가 금성전자 상담실의 첫 내담자라고 하니 어색할 법도 한 일이다. 가볍게 현재 상황에 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가볍게 되었지만, 대화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메모하며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요. 아직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지만 그 사람이 제게 앞으로 하게 될 행동을 생각하면 미리 처리하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상담사는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아무리 사무실과 다른 공간에 있는 상담실이지만 일단 이곳은 회사의 사내 상담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이 보장되는지, 불이익을 받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내가 몇 차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비밀 보장을 약속했다.  

“저의 팀장이에요. 팀장 역할을 하는 사람이에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난 같은 팀에 좌천되다시피 오게 된 조병진 팀장과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벼랑 끝까지 떠밀려 오게 된 팀장은 먹거리가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이 팀에 억지로 오게 된 내가, 그의 군침을 돌게 만든 먹거리가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금성전자에서 겪은 지난 7년간의 이야기를 모두 해버렸다. 생산부에서 폭언을 듣고 모욕을 받으며 참아온 이야기, 후배들에게 무시당하고 선배들에게 차별받은 이야기, 테스트 그룹에 와서는 일 중독자에게 걸려서 밤새워 일하다가 결국 지금과 같이 나가떨어진 이야기를 대략 삼십 분에 걸쳐서 했다. 다른 사람에게 지난 회사 생활 얘기를 전체적으로 얘기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이 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철수님은 참 어려움이 많으셨겠어요. 게다가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고 앞으로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혹시 어떤 신체적인 변화는 없을까요?”  

“맞아요. 있었어요. 오늘 갑자기 머리가 멍하면서 띵하더라고요. 뇌 쪽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문제인지 쉽게 좋아지지 않고 있어요.”  

두뇌의 어떤 문제는 분명히 회사의 압박으로 인해 생겼다고 본다. 회사로부터 받은 염려, 걱정, 불안을 일부러 줄이기는 어렵다. 상담사는 신체적인 변화를 확인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몇 가지 질문과 답변으로 내 정신건강을 확인하려고 했다. 지난 7년간 혹은 지금 이때까지 한 번도 정신건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정신이 황폐하게 되어버리면 현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변해버리고 그렇게 내 정신은 폭력적인 생각으로 휩싸이게 된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버린다. 지금의 내가 그렇게 가고 있다. 우리는 정신건강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정신건강을 관리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그들의 육신만 신경 쓴다. 정신의 중요성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 정신이 피폐해지면 돌이키기 어렵고 그 정신피로에는 정해진 처방전이나 치료법이 없다. 스스로 오랜 시간 수련해도 나아질까 말까 한 병이다. 누구나 정신적인 문제는 갖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보통 본인의 정신이 문제가 없다고 알고 있다. 정신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 문제는 심리적 탈진 상태를 만들 수 있다. 근미래에 폭력적인 사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성장에 육신으로만 따라가고 정신은 따라가지 못했다.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인류의 정신이 혼란스럽다.  

“요즘 기억력도 안 좋아졌고 악몽도 꾸고 있어요. 근데 웃긴 것은 그 악몽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어쩌면 현실이 악몽이 아닐까 생각도 들어요. 깨어나서 아침에 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요. 차라리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기를 바라곤 해요.”  

“정말 힘드시겠어요. 자 호흡을 한번 해볼까요?”  

“갑자기요?”  

상담사는 갑자기 호흡하는 방향으로 나를 안내했다. 상담사도 어쩔 수 없이 어떤 정해진 절차대로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철수님은 지금 여기서 많은 트라우마를 쏟아내셔서 그것만으로도 피로한 상태예요. 호흡으로 알아차리고 내 정신이 숨 쉬는 여유 만들어줘야 해요. 어색하시더라도 그냥 제가 하는 것을 따라 하시면 됩니다. 먼저 자세를 편하게 고쳐서 앉아주세요. 눈을 감고 편하게 앉으면서 되도록 허리와 등 근육과 머리를 일직선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면 좋아요.”


눈을 감았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어두웠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을 때 이외에 멀쩡한 상태에서 일부러 눈을 감은 것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눈을 뜨고 싶지만 참았다.  

“자 이제 호흡을 느껴볼게요. 공기를 코로 들이마시고 공기를 느낀다고 생각해 보세요.”  

[스으으읍]  

“힘은 조금 더 빼시고 코로 공기가 들어왔으면 잠시 몸속에 공기를 두었다가 천천히 내뱉으면서 공기가 나가는 것을 다시 느껴보세요.”  

[스으으으]  

“이렇게 되도록 코로만 숨 쉬도록 해보시는 거예요."  

“다시 들숨…. 코로 마시고.”  

[스으으읍]  

“날숨에 코로 뱉고….”  

[스으으으]  

“잡념이 생기면 알아차리시고 다시 호흡에 집중하면 됩니다. 이렇게 반복이에요.”  

몇 번의 호흡만으로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의도적인 호흡 조절이 이렇게 안정감을 주게 될 줄 몰랐다. 자율신경계를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 내 의식은 그렇게 마음의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무의식의 심연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심리적 탈진 상태였던 정신과 육신에도 활력이 도는 기분이다. 요즘 몇 년간을 생각해 보면 아침에 기상을 하면서부터 하루의 회사 생활에 대한 걱정으로 출근하기 전부터 이미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컴퓨터를 켜면 각종 메일과 메신저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업무에 대한 압박과는 별개로 선후배들과 다른 팀으로부터 수시로 넘어오는 납기에 대한 압박, 회의, 차별은 내게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다가왔다. 그 폭력은 나를 휘감았다. 그러면서 힘이 점점 고갈되었다. 예전에 즐겼던 취미나 관심사조차도 고갈되어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무차별 폭력을 겪은 나의 마음은 7년 만에, 아니면 태어나서 처음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 나는 늘 나의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이제는 그 미래를 책임져야 할 직장에서 괴로움을 겪게 되어서 그 마음이 지쳤다. 그것을 알아차렸다.


“자 기분이 조금 어떠신가요?”  

자신을 스스로 알아차리며 눈을 감고 있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집중해서 들어보니 과연 매력적이었다. 과장해서 생각하면 이 목소리는 그녀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나 또한 그녀의 고민과 걱정을 알고 싶었다. 자신을 스스로 알게 되자 그녀를 알고 싶었다. 상담사와 내담자는 사적인 감정으로 관계를 만들면 안 된다고 알고 있다. 그녀도 점차 내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를 알고 싶었지만 결국 불가능성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철수님?”  

“아…. 네 편안합니다.”  

“네, 그러면 주변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볼까요?”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상담실에 들어오면서 본 축구 경기를 하는 사람들이 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의 소리가 너무 규칙적이라는 생각에 집중해 보니 공조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공조 소리에 집중했다.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순환하고 있다. 그렇다. 공기는 절대로 멈춰있지 않고 계속 순환하고 있다. 일정하게 순환하고 있다. 의식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보듯 무한하게 순환하는 공기의 흐름을 따라갔다. 안과 밖의 경계는 없다.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경계도 없다. 그저 따라갔다. 편안해졌다. 의식이 점점 흐려진다. 잠이 오는 기분이다. 무의식이 다가온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갑작스럽게 낮에 회사 사람들과 산길에 올랐다. 산길이지만 둘레길처럼 완만하게 왕복 2차선의 차도가 형성된 포장도로에 가까웠다. 왜 나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자전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는 속도가 걸어가는 동료들의 속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빨리 가고 싶어서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는데 자전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체인이 꼬였다.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갔다. 더 힘들었다. 자전거가 없는 것보다 못하게 되었다. 결국 걷는 사람들보다 뒤처지게 되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자전거에 올라서 억지로 페달을 돌렸다. 육신과 정신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였다. 발목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면서 체인이 발목에 엮여서 양쪽 발목이 절단되었다. 결국 자전거를 버리고 양쪽 발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발목에 신발을 억지로 끼워서 신발을 계속 고쳐 신었다. 마치 피노키오의 첫걸음마와 같이 걷기는 너무 힘들었고 신발은 자꾸 벗겨졌다.  

“으어어어!”


그것은 외마디 비명이었다. 더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이 정도가 한계였다.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괴성만 나오고 있었다.  

“철수씨”  

누군가 내 뺨을 어루만지며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손의 결이 참 부드럽고 따스했다.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나 싶은 정도다. 그 목소리의 톤과 감촉이 내 마음의 녹는점과 맞아서 배터리 소자처럼 딱딱해진 내 심장을 녹여주고 있었다. 배터리가 On이냐 Off냐 극단을 달리던 내게 그 중간 점을 찾아주었다. 배터리 소자는 들뜬상태, 논리회로 측면에서는 Don’t care 상태다. 양극단으로만 달리는 사람들은 되기 힘든 그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철수씨!”  

정신을 차려보니 상담실이다. 소파에 거의 누워있었다. 쓰러져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명세빈 상담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내 곁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바람에 얇고 푸른 원피스 치마가 조금 말려 올라가서 그녀의 하얀 허벅지가 조금 드러났다.  

“아, 정신이 좀 드세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명상하다가 쓰러지셨어요.”  

상담사는 내게 시원한 우롱차를 한잔 가져다주었다.  

“이거 한잔 드시고 정신 좀 차리셔야겠어요.”  

[꿀꺽]  

단숨에 삼켰다.  

“아…. 이제 조금 정신이 드네요.”  

“네….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여기서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뱉어내서 그런가 봐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하시고 다음에 예약하고 오시는 것은 어떻겠어요? 오신 김에 제가 예약 잡아드릴 수 있어요.”  

“네 그러면 다음 주 이 시간으로 예약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매주 상담실을 드나들었다. 사무실에서 쌓이는 피로가 완전하게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아름다운 상담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덤이었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옷차림과 화장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따뜻한 계절이 되면서 그녀의 옷과 치마가 점점 얇아질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더 크고 두꺼워졌다. 점점 그녀가 더 궁금했고 나 또한 그녀의 걱정과 근심을 묻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서로 속 깊은 대화를 하며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가 여자로 보였지만,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참고 또 참았다.




상담실은 더없이 좋았다. 하지만 사무실로 복귀하면 조병진 팀장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를 가져와서 내 옆에 눌러앉았다. 이렇게까지 사원 한 명을 집중 마크를 하는 리더는 7년간 처음 접해보았다. 사실 지금 맡은 업무가 중요하거나 촌각을 다투는 일도 아니다. 생산팀의 요구사항도 아니고 품질팀의 요구사항도 아니며 그렇다고 테스트 그룹의 과제도 아니다. 그냥 팀 운영의 편의를 위해서 내가 제안해서 만들어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납기가 이렇게까지 집중하여 관리할 필요 없는 일이다. 팀장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꼬투리를 잡았다. 길게 대답하기도 싫었다. 사내 상담 센터를 매주 가고 있는데 자리에 없을 때 팀장이 찾을까 싶어 센터에 다니고 있다는 얘기는 해야겠다 싶었다.  

“아 팀장님 드릴 말씀이….”  

“바쁜데 뭐죠? 용건만 빨리 말해요.”  

“저 근무시간 중에 상담 센터라는 곳을 다니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오고 있어요.”  

“회사에 그런 곳이 있어요?”  

“네, 새로 생긴 곳이에요. 제가 여기 와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테스트 1팀에서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을 안고 오게 되어서 심리치료를 받고자 찾아가서 하게 되었어요.”  

“그래요? 그래요. 그런 것은 알아서 다녀오시고, 그런 핑계로 업무에 지장이 되는 일 없도록 진행해 주세요.”  

팀장은 철저하게 업무적으로 말했다. 상담 센터를 다닌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수가 있었다. 하지만 말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과감하게 말했다. 말없이 자리를 비우면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을 자주 찾기도 했고 잔소리가 많았다. 그나마 팀에서 나를 챙겨주는 선배는 김윤태 과장이다. 하지만 종종 내게 힘내라고 조언해 주는 것이 나를 더 힘 빠지게 했다. 필요하지 않은 일을 만들어서 해야 하는 것과 그것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이 팀의 정체성인 것 같았다. 어쩐지 테스트 1팀의 선배들은 테스트 4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보니 그저 안 해도 되는 일들을 만들어서 관리하고 있다.




팀장이 갑자기 예정에 없던 회의를 소집했다. 선배에게 듣기로는 조병진 팀장이 오고 나서 회의가 늘었다고 했다. 팀장 역시 다른 곳에서 와서 분위기 파악을 위해 회의를 자주 할 수는 있겠지만 조금 과하다 싶은 정도로 갑작스러운 회의를 자주 만들었다. 회의 내용은 한 명씩 뭐 하고 있는지 묻고 대답이 나오면 그것에서 꼬투리를 잡는 식이다. 그는 거의 나를 집중하여 마크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부장님은 요즘 뭐 좀 하시나요?”  

팀장이 이우현 부장에게 물었다. 테스트 그룹의 정신적인 지주 이우현 부장에게 그렇게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팀장이지만 후배가 대선배에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제품별 불량 제품의 현상에 따라 분류 중입니다.”  

“그런 일은 밑에 사람 시켜도 되지 않을까요?”  

“예…. 제가 좀 밑바탕을 만들어두고 밑에 전달하겠습니다….”  

“요한 사원은 어디 갔어요?”  

“분석실에서 여사원들하고 불량품 협력 분석 중이라서요.”  

승윤호 대리가 말했다.  

“내가 여기서 잠깐 분위기 보면 요한 사원만 일하는 거 같아. 여러분 그거 알아요? 회복 탄력성. 위에서 뭐라고 말을 하던 지간, 신경 안 쓰고 본인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불합리한 일이 생기더라도 군소리 없이 한다는 말이야. 그러고 고민하다가.. 혼자 잘 풀더라고. 그게 회복 탄력성이야. 아무튼 여러분들은 탄력이 없어.”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몰라도 회복 탄력성이라는 단어에 빠진 모습이다. 회복 탄력성은 역경, 시련, 실패에도 불구하고 잘 극복하는 마음의 힘을 말한다. 여러 분야에서 연구되고 거론되는 말이다. 조병진 팀장은 그저 주워들은 말을 사용하고 싶었다. 그것으로 본인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보니깐….”  

팀장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팀장의 말에는 누구도 대응하지 않았다. 반박하는 말은 생각할 수도 없고 전에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가 알고 맞장구치냐고 되려 혼났다.  

“요한 사원이 이곳 지방의 금성대학교 나왔죠?”  

“맞습니다.”  

승윤호 대리가 답했다.  

“맞아. 내가 보면 그 지방대학교 나온 애들이 일을 묵묵하게 잘하더라고. 탄력이 아주 좋아. 난 우리 팀 다음 신입사원도 지방대학교 나온 애로 뽑을 거야. 서울에 어디 뭐 좋은 대학교 나온 애들 아무 소용없어. 걔네들은 지네 잘난 줄 알지. 탄력이 없어. 아주 고집불통이야. 애들이 노예근성이 있어야지. 그런 면에서 지방대학교 나온 애들이 노예근성이 있어서 좋아.”  

어이가 없었다. 팀장의 말은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수도권 대학교 출신이나 지방대학교 출신이나 모두가 어이없을 내용이었다. 모두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회복 탄력성과 대학교에 관련된 얘기는 어쩌면 나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회복 탄력성은 심리상담 분야에 관련된 내용이고 인서울 대학교를 나온 나의 모습이 못마땅해서 현장에서 일하는 지방대학교 출신의 막내와 비교한 것이다. 갑자기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화병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팀장의 정신적인 공격에 내 정신이 방어막을 펼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왜 저 빌어먹을 팀장 때문에 방어막을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왜 이런 빌어먹을 테스트 그룹에 와서 3년간 인정받기 힘든 자질구레한 일을 하고 3년 연속 진급을 누락한 것인지 모르겠다. 또다시 살인 충동이 느껴졌다. 내 앞에 누구든 죽이고 싶었다. 내 손에 회칼만 있다면 눈에 거슬리는 인간의 복부에 칼침을 몇 방 놓아주고 싶었다. 갑자기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실제로 몸이 차가워진 것인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 기분 같아서는 입김도 나올 것 같은 상황이다. 되려 내가 칼침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헉….]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었다. 심장은 뛰는데 호흡하기가 어려웠다. 가슴에 손을 올려서 심장을 느꼈다. 심박수가 평소보다 빨랐다.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심박수가 빨라진 것이 이상했다. 심장 근육이나 신경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장이 그냥 빨리 뛰었다.  

[쿵쾅, 쿵쾅]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에 다 들릴 것 같았다. 주변을 보니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호흡이 힘들어져서 가슴이 답답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쉬어봤다. 마치 장거리 마라톤을 달린 이후처럼 숨쉬기가 벅찬 상태였다. 아마도 7년의 회사 생활이 내게는 장거리 마라톤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는 지금의 호흡곤란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은 정도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주변의 누구도 내 상황을 모른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렇게 회의실 바닥으로 영원히 쓰러질 것 같았다.  

[철퍼덕]  

“뭐야, 철수야! 철수야!”  

멀리서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죽는 것인가 싶었다.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보건센터 의무실 간이침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무실 직원 대부분은 퇴근한 모양이다. 창밖을 보니 어두웠다. 오랜 시간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깨어나셨어요? 아니 회의실에서 쓰러지셨다면서요?”  

의무실 간호사다. 당직인 것 같다. 나이는 약간 지긋해 보인다.  

“아…. 제가 여기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죠?”  

“저도 교대를 해서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두세 시간 정도요? 지금 상태는 좀 어떠세요? 좀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겠어요? 정 힘드시면 사외 병원을 가보시는 것도 좋겠어요.”  

“네…. 아까보다는 조금 낫네요…. 따로 처치해 주신 것은 없죠?”  

“늦은 오후에 상주해 계시던 의사 선생님이 링거 수액 하나 놔주셨어요. 비타민 주사라고 전달받았어요. 만성 피로가 심한 것 같다고 하셨다죠? 지금은 제거되었지만 주사 자국이 있을 거예요."  

“네…. 그렇네요.”  

사람이 쓰러졌으면 사외 병원으로 데려가 주면 좋을 텐데 역시 회사는 상당히 폐쇄적이다. 사외 병원을 가게 되면 구급차가 출동할 것이고 혹여나 잘못될 때는 회사에 안 좋은 영향이 있을까 봐 이런 방법으로 시간을 벌면서 상황을 보는 것이다. 회사에서 많이 쓰는 방법이다. 특정 사고로 중상을 입는 경우 또는 바로 사망하지 않는 이상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사내 병원에서 일차적으로 해결한다. 예전에 다쳤을 때 안전팀 담당자로부터 산재 처리를 공상 처리로 하도록 거의 반협박을 받은 기억이 난다.  

“저는 그러면 들어가 볼게요."  

“네 여기 사인하나 하시고….”  

간호사가 건네준 종이에는 이상이 없어서 퇴실한다는 내용의 증명서가 있었고 하단에 사인을 받게 되어있었다. 사인을 한 이후에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회사는 참 냉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는 은밀하게 어디엔가 전화를 했다. 아마도 내가 깨어났다고 어딘가로 보고하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매우 어둡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실내에서 바라본 밖의 풍경보다는 가로등과 조명이 가득한 밖에서의 밝기가 더 밝은 기분이었다.  

[삑, 출문하셨습니다.]  

기절한 바람에 인제야 퇴근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누워서 보낸 시간까지 야근 시간으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회사 생활의 번뇌로 인해서 쓰러져 보낸 시간은 내 탓이 아니고 회사의 탓인데 야근 시간으로 인정받기 힘들다는 것이 씁쓸했다.  

[지이이잉]  

전화가 왔다. 조병진 팀장이다.  

“철수 사원? 일어났다면서요? 아니, 사람이 왜 그렇게 약해? 정신 문제가 아니고 몸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 큰 병원에 가봐요.”  

이 사람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을 하는 것인지 못마땅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가 깨어난 것을 어떻게 바로 알았는지 궁금했다. 지금으로서는 아까 어딘가 은밀하게 전화를 하던 간호사가 의심스럽다.  

“네, 뭐 지금은 일단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일단이 아니고 앞을 생각해서 가보라는 말이에요. 한국말 못 알아들어요?”  

“알겠습니다….”




조병진 팀장은 매일 내게 살인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폭언과 폭행은 없었지만, 사람을 끝없이 무시하며 깔보는 눈빛은 내게 폭력적이었다. 자존감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지하실까지 떨어졌고, 그 폭력으로 인해 내 마음과 정신에는 수많은 피멍이 들었다. 내가 하는 업무를 경험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 사정도 모르고 그것이 납기 안에 완료 안 되는 이유를 따지기에만 집중했다. 매일같이 그 이유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나중에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도 갖다 붙였다. 내가 살고 봐야 했다. 제품 분석 도구가 아니고 살인 도구만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조병진 팀장을 찾아가서 속사포 같은 속도로 그의 복부에 칼침을 넣고 싶었다. 또는 그런 상상을 하며 하루를 견뎌냈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눈을 뜨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아침이 밝으면 또 그 사무실에 가서 팀장을 만나고 무시당하고 핑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현관 밖으로 한 걸음을 내미는 것이 힘들었다. 급기야 밖에 나가면 누구든 해치고 싶었다. 무차별 칼부림 범죄를 저질러서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를 만들 것 같았다. 운전대를 잡았을 때도 눈앞에 거슬리는 누구든 때려 박고 싶었다. 피폐해진 내 모습을 보면 지금까지 인내하며 버틴 시간이 아까웠다. 지금의 나를 이렇게 만든 테스트 4팀 조병진 팀장, 테스트 1팀 시절의 문구열 과장과 정수희 과장 그리고 수많은 생산팀과 품질팀의 방해자들을 모조리 처리하고 싶었다. 아니, 배터리 회사를 자체를 폭발시키고 싶었다. 죄가 없는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렇게 된 나를 방치한 것이 죄명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화가 나다가도 갑자기 삶에 미련이 없어지고 있었다. 그냥 스스로 소멸하고 싶었다. 아침에 눈이 떠질 때마다 소멸하지 못했다는 것에 슬펐다. 옥상으로 올라가서 투신자살을 꿈꾸다가도 그것이 무서워서 함께 죽음을 맞이할 사람을 찾기 위해 자살카페도 검색해서 기웃거렸다. 차라리 죽음을 맞이하며 흙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우주 속의 먼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해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스스로 사라지고 싶었다. 난 다양한 감정이 들며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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