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부추기는 사회다. 당최 모르겠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독서 인구가 매년 줄어들고 있는데 그 와중에 글쓰기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글을 쓰려면 일단 읽어서 내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기를 건너뛰고 글쓰기를 먼저 한다는 행위는 사람들의 욕망을 내세워 장사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독서도 오랜 시간 다양한 책의 문장들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며 소화를 해야 한다. 본인과 맞는 책이 있을 수 있고 안 맞는 책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글쓰기를 말하는 사람들의 추천 책은 언제나 상업적인 베스트셀러와 자기계발책이 주름잡고 있다.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 읽고 쓰기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행위다.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읽고 쓰기만으로 경제적인 자유를 얻는다면 좋겠지만 읽고 쓰기의 제일의 목적은 정신적인 자유라고 생각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정신적인 자유를 꿈꾸며,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실존을 생각한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부조리를 생각하고,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깨달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를 읽고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을 생각하고, 이미상의 [모래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을 읽고 세상에 보이지 않던 폭력을 생각한다. 오웰의 [1984]를 읽고 미리 그려본 디스토피아와 빅브라더에 놀라고, 하루키의 [1Q84]를 읽으며 신비로운 감성을 채운다. 룰루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비판하고, 채사장의 [소마]를 읽고 감동한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읽고 차가워지고,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뜨거워진다. 이 책들은 물론 추천받은 책도 있지만 대부분 내가 적극적으로 골라서 읽은 책이다. 물론 아직 읽지 못한 더 괜찮을 법한 책들도 쌓여있다. 다만 위 책들은 읽을지 말지 직접 판단하면서 읽은 책이라서 아직도 책의 표지만 보면 책을 읽으며 받은 감동의 여운이 느껴진다. 물론 최근 읽은 수백 권의 책과 단편 중에는 실망스러운 글도 많고, 심지어 시간 낭비를 했다고 느껴지는 책도 있었다. 이렇듯 독서는 개인의 선호에 맞게 골라내며 판단하며 읽어야 한다.
[역행자]로 유명한 자청은 본인의 서사를 강조한다. 그 서사를 강조하는 것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읽고 쓰기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절묘하게 본인의 서사를 입혀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독자를 유혹한다. 그 방면에서는 업계 최고라고 보인다. 만만치 않은 김태광 작가도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어떤 방면에서는 대단한 사람이다. 2011년 최단기간 최다 출판 부문으로 수상을 했던 그는 지금 혼자(?) 20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다. 인간이 가능한 일인가 싶다. 아마도 출간 공장이 있다고 보인다. 그의 대부분의 책은 자기계발책인데 놀랍게도 시대에 잘 나가는 트렌드를 짜깁기 해서 출간한다. 최근에는 [죽음 이후 사후세계의 비밀]이라는 이상한 종교색이 입혀져 있는 책도 출간했다. 자청, 김태광 이 둘은 글쓰기 강좌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전 개그맨 고명환 씨도 읽고, 쓰기로 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한 책을 쓰고 강연을 하러 다닌다. 그의 개그맨 이후로의 서사는 개인적으로 놀랍고 본받을만하지만, 사람들을 부추기는 모습은 다소 보기 불편할 때도 있다. 애플은 OS 업데이트를 하며 [일기] 앱을 공식 앱으로 넣었다. 쓰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쓰기 쉽게 만들어준 앱이다. 사용 소감으로는 역시 애플이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스스로 쓰는 사람이 되게 부추기는 애플의 전략이 놀랍다.
이 밖에 원론적으로 글쓰기를 추천해 주는 강원국 작가, 생활의 글쓰기를 알려주는 이슬아 작가, 제대로 된 글쓰기를 알려주는 강창래 작가, 생존의 글쓰기를 알려주는 은유 작가, 생각문장을 알려주는 이만교 작가, 우리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던 이오덕 선생님 등,, 글쓰기 멘토로 삼을 사람이 다양한 세상이다. 글을 쓰려면 자본을 떠나서 고전부터 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좋은 문장을 읽고, 깨달은 다음에 내 것으로 만든 다음에 상업적인 글쓰기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나만의 글쓰기를 생각하며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