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무려 29년 전에 발표한 한강 작가의 첫 소설집.
그 소설집의 메인 단편 <여수의 사랑>.
분량은 53페이지로 짧지 않은 중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이다.
소설은 김명인의 [여수]라는 시로 시작한다.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운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주인공 정선이 여수를 떠올리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독자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묘사들이 이어진다. 한강 작가는 29년 전부터 이미 현실적인 관념을 넘어가는 다른 차원의 묘사를 문장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다. 아래는 그중 일부.
-. 여수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
정선은 기차를 타고 여수로 가고 있다. 어디로 무엇 때문에 여수를 생각하고, 여수로 가고 있는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든다. 어딘지 모를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글은 그 어떤 그리움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계속 이어진다.
어항과 죽은 금붕어를 정리하고 욕지기가 치밀러 올라 토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욕지기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처음 보는 단어이지만 느낌으로는 부정적인 단어 같은데 찾아봤다. 토할 듯 메슥한 느낌을 말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아무튼, 정선은 실제 구토를 한다.. 그러면서 환청이 들리고.. 룸메이트 자흔과 지내던 시절의 과거를 회상한다.
정선 ‘더러워,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구요..’
자흔 ‘뭐가요? 뭐가 더럽다는 거예요.’
이 둘은 서로를 이해 못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정선이 자흔을 처음 만나게 된 시절로 돌아간다. 정선은 극심한 결벽증의 소유자다. 극단정인 방법으로 청소를 한다. 책장의 책까지 모두 꺼내서 털어낼 정도다.(과거) 정선은 어딘가 아픈 것 같은데 어떤 검사를 해도 병명이 밝혀지지는 않았다.(현재)
이 소설은 현재, 과거를 갑자기 왕복을 하며 서술되고 있어서 적응하기까지는 조금 이야기의 갈피를 잡기가 쉽지는 않았다.
정선과 자흔의 생활을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는 한동안 그것이 그대로 서술된다.
-. 자흔과 나의 생활은 한마디로 물과 기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자흔에게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녀가 돈을 대하는 태도였다. 자흔은 아무 데나 눈에 보이는 곳에 자신의 소지품들을 늘어놓곤 했는데, 화장대며 싱크대며 세면장 문턱에까지 토큰과 동전 들, 심지어 만 원권 지폐까지 뒹굴고 있기 일쑤였다.
정선은 몇 번 불만을 표시했지만 자흔은 전혀 들어먹지 않는다. 그렇게 정선은 자흔의 습관, 외모, 행동 등 모든 것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지만 적당히 말하고 적당히 참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둘은 갑자기 여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정선의 고향이 여수였고, 자흔이 그것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이다. 자흔은 고향이 여수였지만 어린 시절 태어나기만 여수에서 태어났을 뿐, 여러 도시를 전전하는 삶을 살았다.
애기 때 강보에 싸인 채로 열차 안에서 발견된 자흔. 그녀는 그저 여수에서 출발한 기차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로 여수가 고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천의 고아원, 전주에 입양, 양아버지의 죽음으로 충무로 이사, 속초의 외삼촌 등 실제 전국의 많은 도시를 전전하는 삶을 살았다.
정선의 결벽증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다른 사람과 살갗이 닿는 게 싫어서 대중교통으로 몇 정거장 되는 거리를 땀 흘리며 걸어 다녔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그 결벽증은 계속 이어졌고, 자흔은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자꾸 정선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정선은 철저하게 자흔을 무시했다.
어느 날 자흔이 밖에서 사고를 당해서 정선을 놀라게 했다. 정선은 은근하게 자흔을 걱정했지만 자흔은 몹시 외로워 보였다. 그 후로 자흔은 한 동안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휴식을 했다. 정선은 아마도 그 모습을 보기에 아주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 상황이 읽는 사람의 마음도 불편할 정도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결국..
정선 ‘당신 때문에 내가 견딜 수가 없어..’
자흔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자흔은 떠났다. 자흔은 정선의 집에 수많은 흔적만 남겨두고 훌쩍 떠났다. 아마도 여수로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흔은 여수에 대해 계속 궁금해했고 여수를 상상했다.
-.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아마도 자흔이 떠나고 정선은 해방감, 아쉬움, 공허함을 동시에 느낀 것 같다.
-. 자흔이 떠난 뒤의 나흘 동안 나는 한 번도 책장과 창틀의 먼지를 닦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집요한 걸레질도, 때 묻을 겨를도 없는 흰 걸레를 몇 번이고 두들겨 빨아야만 했던 강박 증상도 사라지고 없었다. 퇴근하여 돌아와 누우면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평화가 피로한 육신을 어루만지며 밀려들었다.
그렇게 기차가 여수에 도착하며 본 소설이 마무리된다.
만남, 이별 그리고 여행 그 안에서 병적으로 물들어 있던 주인공 정선을 해방시키는 그 어떤 탈출구. 정선은 숨 쉬기 위해 아가미를 움직이는 금붕어처럼, 그렇게 본인도 모르게 여수행 열차에 탑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흔은 정선을 조금 더 보통의 인간답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목적 없는 삶 속에서 어떤 질병을 앓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어떤 방식으로든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