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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Dec 11. 2024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다시 복직을 준비했다.

병가휴직 160일째,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들러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빵과 우유를 바로 먹었다. 몸이 무거웠지만 조금씩 움직이며 추억이 담긴 상자를 열어 예전의 피규어를 꺼내 사진으로 남겼다. 어머니가 돌아오신 뒤 오랜만에 집밥을 맛보며 어머니가 털어놓은 지난 시절의 시집살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부모님은 힘겨운 세월을 견뎌냈고 나는 그 앞에서 불평을 삼키며 그저 건강하시기만을 바랐다. 이후 집을 나서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가려 했다. 아내가 기다리는 곳에 도착해서는 당일 예약이 어려웠던 레스토랑 방문을 시도했다. 마음은 들뜨지 않았고 자신이 늙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여유가 있는 식당을 찾아 아내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까웠으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병가휴직 161일째, 윗집에서 들려오는 공사 소리에 일찍 눈을 떴다. 책을 보다 다시 잠들었고 다시 깨어나도 소음은 여전했다. 조용한 환경도 복이라는 생각을 하며 장자 관련 강의를 담은 책을 완독 했다. 인생책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깊은 여운이 남았다. 아침부터 목이 아프더니 열이 올라 감기 기운이 도졌다.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일본에서 사온 초기 감기약을 삼켰다. 복직을 앞두고 몸이 약해지는 듯해 건강에 신경 써야 한다고 느꼈다. 영화를 보러 가지 못하고 집에서 아내가 골라준 영화를 감상했다. 평온한 일상을 다룬 작품을 통해 인생이 짧은데 너무 바쁘게만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병가휴직 162일째, 새벽에 잠시 깼다가 다시 푹 잤고 전날보다 몸상태가 나아진 기분이었다. 점심 무렵 익숙한 식당을 찾아가 여전한 맛에 만족했다. 상담소를 오랜만에 방문해 최근의 장염과 각종 사건, 사고가 복직을 앞둔 내게 준 심리적 압박을 털어놓았다. 상담사는 모든 것을 꼬아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했고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이후 아내를 데려다주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부동산을 통해 오래된 집들을 둘러보았다. 하나는 시야는 좋지만 낡았고, 다른 하나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전세를 구할 때는 지금 상태가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아내와 의견을 나누었다.


병가휴직 163일째, 어젯밤 책을 읽다 불을 켜둔 채 엎드려 잠이 든 뒤 새벽에 깨어나 잠자리를 정리했다. 부동산에서 빨리 결정하라는 독촉을 받아 아내의 일정이 끝나자마자 다시 집을 보러 갔다. 낮에 다시 본 집은 여전히 괜찮게 느껴졌고, 아내와 대화를 나누다 다른 부동산도 들러보았다. 새로운 중개인은 친절했고 더 높은 층에 깨끗한 매물이 있다고 했다. 귀찮게만 느껴졌던 첫 중개소와 달리 비교적 신뢰감이 갔다. 저녁엔 그들과 만나 양갈비를 먹었는데 통째로 나오는 고기 덩어리의 풍미와 술맛에 취해버렸다. 그 순간 기억을 잃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병가휴직 164일째, 분명 전날 양갈비를 먹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였다. 숙취로 머리가 무겁고 어떻게 귀가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어젯밤을 더듬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명상 수업이 있는 날이라 억지로 버스에 올라탔고, 수업 내내 집중하기 어려웠다. 명상이 끝나니 술이 조금 깬 듯했고,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준비한 카레를 먹으며 몸을 추슬렀다. 술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다시 다짐했다.


병가휴직 165일째, 속이 안 좋아 아침부터 화장실에 들르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숙면한 뒤 가야 할 곳이 생겼다. 아내, 장모님과 함께 이사 갈 집을 보러 나섰다. 유명하다는 병원에 가서 대기 시간을 견디며 진료를 받았고 의사는 친절했다. 부동산에서 본 13층 매물은 수리가 잘 되어있고 매매로 사도 좋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세 사람이 모두 만족하여 바로 계약하기로 했다. 저녁에는 친했던 후배를 만나 오래 묵은 마음의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이 부질없다는 것을 느꼈다.


병가휴직 166일째, 아침에 자동으로 눈이 떠졌지만 목이 아프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제 말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공기가 나빴는지 찬바람을 많이 쐬었는지 몸 상태가 안 좋았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누워서 김제동 씨가 쓴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글 속에서 인간미를 느꼈고 언젠가 그와 소통할 기회가 생긴다면 꼭 참여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다시 복직을 준비했다. 때로는 가족의 따뜻한 밥상과 마음을 나누는 대화가 힘이 되었고, 아내의 배려와 관심으로 몸이 아플 때마다 버틸 수 있었다. 상담소를 찾아가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놓고 명상으로 정신을 다듬었으며, 혼란스러운 사건과 실수도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였다. 낯선 맛집과 새로운 집을 찾아다니며 일상의 변화를 느꼈고, 술이 빚어낸 실수도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시간은 내가 스스로를 돌보고 다독여 다시 일어설 힘을 기르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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