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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May 03. 2024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가난했던 그 시절…

나는 1953년 6월 25일 인천 송현동에서 태어나 송현국민학교 정문 앞 목욕탕 뒤 골목 안에 있는 앞마당도 없는 조그마한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미군부대 일용부로 나가셨고 어머니는 집 앞 큰 길가 도로변에 있는 화교인 중국집 문 앞에서 조갯살을 까면서 야채류를 조금 널어놓고 노점상을 하셨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도 부모님은 나를 과외공부까지 시키셨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부모님 사랑인 것을 살면서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조개류를 먹지 못했다. 근래에 먹기 시작했다. 아마 노점상을 하시며 매일 길가에 쪼그리고 앉으시어 조갯살을 까는 모습이 주위사람들에게 창피하고 수치스러워 세월이 흘러도 먹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조금씩 돈을 모아 빚을 안고 도로변에 구멍가게가 딸린 기와집을 사서 이사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노름을 좋아하여 돈이 되는 물건들은 무조건 가져다가 노름 밑천으로 버리셨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살기가 힘들어 결국 야밤에 옷가지만 싸가지고 송림동 8번지 염전 옆에 있는 판잣집으로 도망해야 했다. 그곳에서 빚쟁이들에게 잡힐까봐 전전긍긍하며 온 가족이 동네 목재소에서 일하며 근근이 먹고살아야 했다. 사는 동안 쌀밥은 고사하고 보리밥 구경조차 못한 채 곰표 밀가루를 반죽해서 양념도 없이 국물에 고추장을 풀거나 소금을 뿌려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반찬도 없이 매일 먹었 다. 어머니는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셨는데 기르던 개도 수제비를 먹여 키웠다. 아침마다 단칸방 창문을 열면 염전에 버린 갓난아이 신생아들의 주검이 매일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살았다. 너무나 조그마한 갓난아이의 시신은 그 시절에는 무섭기만 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가난하고 문란한 사회환경 속이라지만 소중한 생명체를 염전에 유기하여 버린 다는 행위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충격적이며 너무나 큰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나는 똥지게도 지었다.


그 시절 나는 그나마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여동생은 여상을 다니다 중퇴하고 남동생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가족 모두가 빚쟁이를 피하여 야밤에 송현동 집을 떠나야만 했다. 나도 내일이 없는 막연한 생활이 싫어서 무작정 집을 나와 동인천역 부근을 부랑아처럼 떠돌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동인천 역전 친구들과 술만 마시며, 합동 여인숙에서 자거나, 친구(지금은 시인이 됨)가 먹고 자고 청소하며 지내던 배다리 펜글씨 학원에 가서 책상을 붙여 놓고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냥 누군가 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내가 못나고 부모덕도 지지리도 없다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했다. 그러던 중 서울에 살고 있는 큰외삼촌과 소식이 닿았다. 큰 외삼촌이 나가시던 노량진 수산시장에 중매일을 배우고자 하여 서울 아현동 고가아래 큰 외삼촌댁 구석 쪽방에서 같이 살았다. 하나 새벽 일찍 일어나 일을 해야 하는 고충과 큰 외숙모의 귀찮아하는 멸시가 심함은 물론 집을 떠난 외로움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며칠 못 있다가 인천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말았다. 집에 와서도 나는 큰아들인데 동생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 키고 가정 살림살이도 못 챙기는 바보천치라는 죄의식으로 자포자기하며 이리저리 유흥거리를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기만 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동인천역 부근 2층에 있는 중앙일보 인천지사 총무 모집공고를 보고 취직을 하게 되었다. 말이 신문사 총무였지 배달학생이 부족하면 신문배달도 하며 수금업무를 하는 일이었다.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배달하려니 수치스러움도 많았지만 참으며 일을 했다. 그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학비를 마련하는 고학생들이 많아 같이 지내며 월 2만 의 봉급이었지만 내 생활에 많은 변화와 보람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서울 대방동에 사시는 큰외삼촌 내외분도 80대 중반이 되시어 귀도 안 들리고 성치 않으신 몸으로 지내고 계신다. 그 시절 어린 조카에게 마음의 상처를 너무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지금은 잘 대해주시어 우리 부부는 매년 생신 때마다 찾아뵙고 식사대접을 해드리고 있다.


한편 40여 년 전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급히 우리 부부를 찾으셨다. 어두워진 눈으로 기어서 문갑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 우리 부부의 손에 꼭 쥐어주시고 돌아가셨다. 그 동 안 이리저리 이사 다니며 이것을 잊고 살았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 나에게는 묵주를, 아내에게는 미사포를 주셨던 것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은총으로 우리 가족은 모두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다. 우리 부부와 두 아들 부부, 손주들도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외할머님 고맙습니다.
하느님께 천상에서 외할머님의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를 매일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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