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라는 상호 간의 위로
언젠가 누군가 내게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지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반드시 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진 않다. 하지만 대체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들은 있다. 그중 하나는 '글쓰기'다. 글쓰기 자체로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나는 내가 왜 스트레스를 받으면 글을 쓰면서 해소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책을 읽다가 꽂힌 구절에서 나는 어렴풋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책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는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눴던 라 보에티가 죽고 난 후 아주 오랜 시간 깊은 수심에 빠졌고, 그 후 다시는 우정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가장 훌륭한 형태의 보상을 발견하는데 그의 저서 '수상록'에서 라 보에티가 인정해주었던 자신의 진정한 초상을 창조해낸다.
저술 행위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실망에 자극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다른 곳의 어느 누군가가 이해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고무되었다. 그의 책은 특별히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말 걸기였다.
그는 서점을 찾을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자아를 표현하는 행위의 역설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글을 가장 많이 쓰던 시기는 외로울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상황적 요인으로 그러지 못할 때.
늘 함께 대화하고 생각을 나눴던 사람을 잃었을 때가 있었다. 그 후에 자주 혼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생각에 잠겨 걷곤 했다. 그러다가 내 앞의 두 사람이 대화를 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그 사람과 저렇게 대화하며 걸었었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시기에는 글을 자주 쓰지는 않았고, 글을 쓰더라도 기록을 위한 짤막한 글 위주로 썼던 것 같다.
그러다 그 관계를 잃었을 때 나는 긴 글을 자주 쓰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표현하던 나의 말들이 갈 곳을 잃어서였을까. 주로 일기를 썼는데, 하루 한 번도 모자라 아침에 일어나서, 문득 어떤 생각이 들 때, 자기 전에. 그땐 마치 살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 같았다.
우리는 이런 역설에 감사해야 한다. 저자들이 말을 걸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에 써진 책들의 수를 감안하면 서점이야말로 그런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가장 값진 목적지가 아닐까.
몽테뉴는 개인적인 고독감을 덜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책은 우리 자신의 외로움도 약간은 경감시켜줄 것이다.
몽테뉴 같은 뛰어난 저자들이 왜 글을 썼는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 역시 글쓰기를 통해 어느 정도는 위안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글쓰기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서로 위로가 되어준다.
실제로 외로움과 글쓰기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글쓰기는 외로울 때 찾게 되는 가장 좋은 친구 중 하나이고,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쓴 글은 실로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되어준다. 이것만으로도 내가 앞으로 계속 글을 써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