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수업이 끝난 뒤의 풍경은 형우에게는 언제나 낯설었다. 교문 앞에 서 있는 학원 차들과 거기에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가는 아이들, 직접 차를 끌고 와 아이들을 태우고 가는 부모님들, 그 모습들을 외딴섬처럼 멀리서 부러워하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돌쇠가 옆에 있다. 형우는 외딴섬에 육지로 이어지는 다리가 놓인 것 같았다. 마치 미지의 신대륙으로 나아가는 콜럼버스의 배에 탄 것 같은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함께 느끼며 돌쇠와 집으로 향했다.
"돌쇠야, 근데 아까 창형이한테 했던 말은 진짜야?"
"무슨 말?"
"반 피구 대항전."
"그럼, 진짜지. 벌써 선생님들한테 가서 허락도 받아놨어. 그래서 반별로 돌아다니면서 참가 신청을 받았는데 우리 반까지 합해서 네 반이 대결할 거야. 반별 대표를 남자 셋, 여자 셋 해서 총 여섯 명씩 뽑을 거야. 우리 반은 안창형, 그리고 나하고 네가 남자 대표로 나간다. 여자애들은 연사랑이 정해서 알려줄 거야."
"뭐? 내가?"
형우가 화들짝 놀라며 돌쇠를 가로막아 섰다.
"나, 나는 왜? 나 피구 젬병이야!"
돌쇠는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안창형이 있잖아. 왕 피구는 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기고 지고가 결정되는 거야."
돌쇠는 불안해하는 형우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형우를 이끌고 형우 집으로 향했다. 반 피구 대표로 뽑혔다는 사실에 넋이 나간 형우는 얼떨결에 돌쇠에게 이끌려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돌쇠를 보며 물었다.
"근데 너 우리 집 어떻게 알아?"
돌쇠는 무심코 왔던 길이라 자신이 처음 형우 집에 가는 것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돌쇠는 얼버무리며 "어떻게 오긴, 네가 이쪽으로 걸어왔잖아. 어디냐, 빨리 들어가자." 말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형우 네 집 풍경은 예전과 그대로였다. 좁은 거실은 부엌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바닥은 갈색 장판이 오래되어 누렇게 바랬다. 현관문 바로 옆이 형우 방이었다. 돌쇠는 십 년 넘게 형우와 함께 이곳에서 지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었다. 형우가 부끄러운 듯 돌쇠를 뒤로하고 자기 방문을 열어 보여주며 말했다.
"들어와. 할아버지는 오늘 당직이라 내일 오실 거야. 할머니는 저녁 늦게 오시고…."
형우 할아버지는 아파트 경비를, 할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형우는 늘 저녁을 혼자 먹었다. 돌쇠는 항상 그 옆을 지키며 외롭게 홀로 있는 형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함께 할 수 있다.
돌쇠와 형우는 형우 방에 앉아 낮에 갈기갈기 찢긴 종이 카네이션을 다시 만들기로 했다. 형우는 빨간 색종이와 초록 색종이, 가위, 딱풀을 가지고 와서 바닥에 깔아 놓았고 돌쇠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카네이션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돌쇠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형우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놀이터에서 모래놀이해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성을 만들고 집을 만들고 마을을 만들었다. 종이접기를 해도 허투루 만드는 법이 없었다.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는 형우를 돌쇠는 늘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형우야, 넌 꿈이 뭐야?"
"......꿈?"
형우는 집중해서 카네이션을 만들면서 대답했다.
"그런 거는 아직 잘 모르겠어."
"형우 너는 만들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쪽으로 나가봐."
"그, 그래? 그냥 다들 이 정도는 만들지 않아?"
"아니야, 내가 옛날부터 느낀 건데, 형우 넌 뭔가를 만들기
시작하면 밥도 안 먹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눈빛이 빛나더라. 그게 너한테 주신 달란튼가 봐.”
“옛날부터?”
형우는 전학을 온 지 얼마 안 된 돌쇠가 ‘옛날부터’라고 하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돌쇠는 뜨끔해서 ‘어이구 이 얼간이.’ 속으로 자신을 핀잔주고는 ”아, 그렇지. 나는 형우 너를 왜 이렇게 오래전부터 봐온 것 같지? 넌 안 그러냐? “눈을 크게 뜨고 형우에게 답을 강요했다. 그러자 형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헤헤, 그러게. 나도 돌쇠 너랑 예전부터 안 것 같아. 아, 라면 먹을래?“
형우는 8살 때부터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다. 돌쇠는 늘 그 옆을 지키며 형우가 쓸쓸하게 라면을 끓여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형우가 끓여온 라면을 함께 먹으며 돌쇠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참느라 애를 썼다. 형우 옆에서 늘 지켜보기만 하면서 그 옆에서 함께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기만 했던 날들이 생각난 탓이다.
“맛있다!”
형우는 돌쇠가 감탄에 겨워 눈물을 찔끔 흘리는 모습에 뿌듯했다. 둘이 라면을 먹고 나서 형우는 카네이션을 완성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식당 아줌마, 세 명 것을 꺼내어 돌쇠에게 보여주었다.
“어때? 괜찮아?”
돌쇠는 말없이 흐뭇한 미소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건 돌쇠, 네 거.”
형우가 카네이션 두 개를 돌쇠에게 건네주었다.
“종이가 남아서 같이 만들었어, 너희 부모님이 좋아하실진 모르겠지만……“
돌쇠는 울컥해서 눈물이 눈가에 맴돌았다.
“아, 이 녀석, 역시 착한 우리 형우다. 자 돌!”
돌쇠가 팔을 쭉 뻗었다. 형우도 신나서 돌쇠가 뻗은 팔 위로 자기 팔을 쭉 뻗으며 외쳤다.“
“형!”
“크로스!!”
돌쇠는 그날 집에 돌아가 한조와 관우에게 석종의 엄마, 아빠로 변하라고 시킨 후 카네이션을 꽂아주었다.
“야, 야, 이게 뭐야?”
한조가 놀라 물었다.
“가만있어. 형우가 선물한 거니까 그냥 받아.”
“근데 이거 좀 아픈데?“
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어디가?”
“여기.”
관우가 가리킨 곳을 보니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옷 속을 지나 가슴살까지 꿴 채로 꽂혀 있었다.
“야, 이 미련 곰탱아! 아프면 꽂을 때 말했어야지!”
돌쇠가 놀라서 핀을 뺐다.
“화타 선생, 이 관우는 칼로 살을 파내도 아무렇지 않다오, 으……“
그런 관우를 한조가 한심한 눈으로 보며 한숨짓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형우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종이 카네이션을 꽂아드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 위로 눈물만 흘렸다.
학교에 간 형우는 3교시가 끝난 후 돌쇠와 같이 급식실에 가서 아주머니에게 카네이션을 건넸다. 아주머니의 눈은 놀라서 커졌지만, 얼굴에는 예상하지 못한 선물로 인한 기쁨이 흘러넘쳤다.
“저를 항상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인사한 형우는 수줍어하며 뛰어서 먼저 교실로 돌아갔다. 돌쇠는 그런 형우를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