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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마저씨 Oct 23. 2024

돌쇠, 안창형에게 희망을 품다.

교실로 돌아와 앉은 안창형의 귀에서는 돌쇠의 말이 울리고 있었다.

‘제발 왕답게 행동해.‘

‘넌 사자로 태어났어.’

‘왜 사자가 하이에나처럼 사는 거야.’

안창형은 할아버지가 작년 돌아가시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창형아, 절대로 다른 놈들한테 밉보이면 안 되는 거야. 다른 놈들 위에 서거라. 그래야 우리 손주지.’

안창형의 할아버지, 안충곤은 상가건물을 수십 채 보유한 알부자였다. 구두쇠였고 동정심이 없었고 돈을 내지 못하는 세입자는 가차 없이 빼앗고 쫓아내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손주에게만큼은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안충곤은 안창형의 아버지인 안형수보다도 안창형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안형수는 약골로 태어나 늘 잔병을 달고 살았고 심약하고 소심해서 안충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안창형은 달랐다. 자신을 똑 닮게 태어난 안창형을 보자마자 이 녀석이 내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라고 말하고 다니며 안타까워하며 동시에 만족해했다고 했다.

안창형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배웠다. 할아버지가 안창형을 데리고 상가를 돌아다니며 월세를 재촉하고 밀린 세입자를 덩치 큰 건달들을 고용해서 위협하고 심지어 가게에서 내쫓는 것도 옆에서 지켜봤다. 두근대는 가슴을 졸이며 할아버지 옆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었던 안창형은 내심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놓자 돌아온 것은 할아버지의 회초리뿐이었다.

“그런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려고 그래!”

안창형에게 나약한 마음과 동정심은 절대로 내보여선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말 중에 돌쇠가 했던 말도 있었다.

“넌 왕으로 태어난 거야. 알겠니? 왕은 지배하는 거야. 다스리는 거라고, 알겠니?”

안창형은 할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4학년이 되어 김승산, 임헌수, 김만석이 안창형에게 붙었다. 할아버지 곁에는 늘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할아버지는 달라붙는 녀석들에게 돈을 주고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면서 본인 말을 듣게 했다. 안창형도 본 대로 배운 대로 했다. 늘 데리고 다니면서 먹을 것을 사줬다. 이 세 명을 달고 집에 나타났을 때 할아버지가 크게 흡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대장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락실을 데려가거나 먹을 것을 사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장의 위신을 살려주면서 같이 놀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 했다. 그때 나타난 게 형우였다. 형우를 골리고 놀리면 넷이 한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게임에서 나오는 유대감 강화 같았다. 일종의 시간 보내기 놀이였다. 형우의 입장 같은 것은 고려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장난도 늘 같은 것을 하다 보면 질리게 되고 재미를 위해선 자극은 점점 더 강해져야 했다. 점점 더 세졌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는 안창형 패거리가 유명해졌다. 5학년이 되어서도 넷은 뭉쳐 다녔고 형우 같은 약한 애들을 보면 힘을 과시하며 괴롭혔다. 아무도 안창형 패거리를 건들지 못했다. 선생님들도 안창형을 건들지 못했던 것은 안창형이 입학하자마자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한 안창형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안창형 앞에 갑자기 돌쇠가 나타났다.

안창형은 처음 겪는 저항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 묻고 싶었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에게 저항했던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 일은 본 적이 없었다. 한주먹감도 안되어 보이는 돌쇠였지만 때려눕히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실제로는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싸움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위협하기만 해도 다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는데 돌쇠는 한번 붙자는 식으로 덤비는 것이다. 온 반 아이들 앞에서 움찔했던 모습, 피구 공에 쫄아 웅크렸던 부끄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옥상으로 따라오라고 했을 때도, 심장을 졸이며 갔었다. 결국, 이렇게 한판 붙게 되는 건가, 긴장하고 있었는데, 뭐라고? 왕답게 행동하라고? 네가 우리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해? 근데 왕답게 행동하는 게 뭔데? 나는 왕답게 행동하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던 건데 네가 말하는 왕이 도대체 뭔데?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이 뒤죽박죽되어 머리가 아팠다. 안창형은 고개를 돌려 돌쇠를 봤다. 시선을 느낀 돌쇠도 안창형을 바라봤다. 둘 다 도발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돌쇠는 안창형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너도 아직은 애인 거야. 아직은 희망이 있는 거야.’

둘은 서로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 앉은 형우는 돌쇠가 뚫어지게 보는 방향을 보고 안창형의 시선이 돌쇠에게 향해있는 것을 보았다. 결국 옥상에서 둘이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돌아와서도 이렇게 서로를 노려보는 것이 형우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카네이션은 다시 만들면 되고, 자신은 지금까지 계속 당해 왔으니 괜찮았지만 자신 때문에 돌쇠가 안창형과 부딪히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종이 울렸다. 안창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쇠에게 왔다. 돌쇠도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거 무슨 말이야.”

“뭘 말하는 거야.”

“그거 있잖아. 무슨 왕. 사자.”

“알 텐데?”

“몰라.”

“알려줘?”

“그래,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돌쇠는 안창형을 향해 한발 다가가서 올려다보며 말했다.

“알려줄 테니 조건이 있어.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뭐, 어려운 건 아니야.“

돌쇠의 말에 안창형을 포함해, 형우, 그리고 반 아이들 전체가 돌쇠에게서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반 대항 피구대회를 하자.”

“뭐라고?”

안창형이 기가 막혀 되물었다.

“반 대항 피구대회. 단, 형식은 좀 달라. 반마다 왕이 있고 지켜야 할 백성이 있어. 왕이 백성을 지키면 이기는 게임인 거야. 백성을 다 잃으면 지는 거고.“

돌쇠는 안창형을 향해 진중하게 말을 덧붙였다.

“우리 반 왕은 너야.”

반 아이들은 반 대항 피구대회를 연다는 말에 신이나 떠들고 있었다. 안창형은 돌쇠의 속셈을 알 수는 없었지만 반 대항 피구대회, 거기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얘기에 솔깃했다.

“할 거야?”

“그래…. 알겠어.”

반 전체가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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