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물물교환
나는 시리얼을 좋아한다. 정말 맛있다. 가끔은 시리얼 먹으려고 일찍 일어나기도 할 정도다. 아침마다 우유에 시리얼을 가득 담아 키우는 콩 화분 옆에 앉으면 먹을 준비 완료다. 매일 날씨가 달라 바깥 경치도 구경하고 밤새 얼마나 콩이 더 컸는지도 살피며 우적거리기 시작한다. 현미 통곡으로 된 시리얼은 단맛 없이 고소하기만 해서 내 입맛에 딱이다. 어느 날은 바삭거리는 식감이 다 없어지기 전에 조금 서둘러 먹기도 하고 다른 날은 멍 때리다가 우유와 함께 눅진한 시리얼을 마셔버리기도 한다. 한 대접 다 먹고 나면 배가 부르다. 아침밖에 안 됐는데 저녁 배처럼 볼록해져서 만족스럽게 출근 준비를 한다.
시리얼 마니아 집에는 우유팩이 쌓인다. 깨끗이 씻어 말린 후 펼쳐서 분리수거를 하는 것도 이젠 제법 프로 수준이다. 몇 달 전 친구로부터 지역 행정복지센터에서 우유팩 모은 것을 휴지로 바꿔준다는 정보는 들었다. 나도 한 번 해 볼까. 환경 문제에 보탬도 되고 휴지도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학생들에게 억지로 시키기보다는 이런 것도 있다고 정보를 주기 위해 미리 한 번 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시리얼이 질리지 않는 이상 우유팩은 어차피 생길 것이고 분리수거도 익숙해졌으니 버리는 장소만 달리 하면 될 일이었다. 크게 성가실 것도 없고 재미도 있겠다 싶어 그때부터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1L짜리 우유를 두 개 정도 먹었다. 다섯 달 정도를 모았나 보다. 오늘 아침에 보니 약 사십 장 정도의 종이팩이 있었다. 제법 두툼한 것을 보니 휴지를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박스 정도는 받지 않을까. 받으면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면서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이팩 뭉치을 안고 집을 나서니 마음은 이미 뿌듯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잠시 짬을 내어 학교 옆 행정복지센터로 출발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약간 긴장이 됐다. 여기는 우유팩을 안 받는 것 아닐까 하는 괜한 걱정도 들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한 직원이 나를 보며 우유팩 가지고 왔냐고 물으셨다. 다행히 받는구나 싶어 세상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지고 온 것을 보시더니 다음부터는 비닐봉지에 담아오는 것이 아니라 끈으로 묶어 오라고 알려주셨다. 오늘은 처음인 것 같아 봐주시는 듯했다. 대답을 크게 안 하면 안 주실 것 같아 그러겠다고 힘차게 답했다. 받는 휴지 개수는 무게로 계산을 한다고 했다. 1kg 당 휴지 한 개를 주실 거라 했다. 나는 많이 가져왔다고 생각했으므로 당당하게 저울 위에 우유팩 뭉치를 놓았다.
에계? 1.5kg이었다. 직원이 애매하게 무게가 나왔다며 나를 보고 곤란해하셨다. 나는 똑같이 곤란한 표정으로 그럼 어떻게 할지를 눈빛으로 물었다. 둘이서 무게 문제가 해결이 안 되자 직원은 일단 거주지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여기가 아니고 직장이 근처라서 왔다고 하자 직원은 좀 전과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관할 구역 안에 살고 있는 주민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 직원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했다. 나를 데리고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저울에 우유팩을 올릴 때의 당당함은 어디로 간 것인지 나는 마치 죄를 지은 듯 직원 뒤를 졸졸 따라 들어갔다.
좀 더 직급이 높아 보이는 다른 직원이 나를 힐끔 보더니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내 사정을 듣고는 다시 나를 봤다. 어리숙한 내 표정이 좀 안 돼 보였는지 이번만 휴지를 주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1.5kg 무게 문제도 간단하게 반올림하셔서 휴지도 두 개를 받았다. 기분이 좋아 꾸벅 인사를 하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두루마리 휴지 두 개를 가지고 행정복지센터를 나오면서 혼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야심 차게 휴지 한 박스를 받아 사람들에게 하나씩 돌리며 자랑을 하려고 했던 내 계획이 휴지 두 개를 보니 뻥 튀겨진 쌀 알갱이 같았다. 세상 물정을 이리도 모르니 한 박스의 꿈을 꾼 것 아니냐 싶었다. 그나저나 휴지 두 개를 어느 코에 붙여야 할지 결정이 안 났다. 학교 안에 사람은 열한 명이고 휴지는 고작 두 개. 오면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학교 사람들 대신 내게 우유팩과 휴지를 교환한다는 정보를 준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누가 나를 보면 그 무슨 청승이냐고 타박을 줬을 것이다. 다섯 달 동안 모아 휴지 두 개로 바꾸는 가성비 없는 그 짓을 왜 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한다. 날씨가 점점 변덕을 부리고 너무 춥다가 너무 더워지는 것이 무서워, 할 수 있는 작은 것이라도 하며 위안을 얻으려는 얕은 수작이라 보는 것이 맞다. 그래도 내가 준 종이팩이 온전히 제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좋기도 하다. 이것이 다시 휴지로 만들어져 다섯 달 후에 또 내 손에 들어오길 바란다. 그때까지 나는 또다시 종이팩 한 장부터 모으기 시작할 것이다. 청승맞지만 다음에는 좀 더 두툼한 종이팩 뭉치를 들고 행정복지센터에 들어갈 꿈을 꿔본다. 어쩔 수 없이(?) 시리얼을 더 열심히 먹어야겠다. 내일 아침이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