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나무
나는 취업이 어려웠다. 시험을 6번 쳐서 겨우 교사가 됐다. 인생이 복잡한 미로 같이 느껴지던 6년이었다. 엄마는 답답해하는 딸을 위로해주기 위해 종종 사주 보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사주를 보면 늘 여름 나무라고 나왔다. 줄기가 크고 잎이 무성해 주변 곤충들과 동물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곳. 사주가 나쁘게 나오지는 않아 삐쩍 마른 나목 같은 현실의 내 모습과는 별도로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귀가 얇은 나는 금세 살이 오르고 잎이 무성한 나무로 바뀔 거란 생각도 했다. 엄마의 위로 방법은 내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무는 중력을 거스르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힘들어도 꾸역꾸역 위로 올라간다. 목의 기운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늘 힘들게 뭔가를 하며 산다. 조금씩 쌓이는 삶이라고 했다. 내가 사는 모습과 닮아 마음이 갔다. 남들은 두세 번만에 끝내는 시험공부를 6년 동안 하면서 나만 왜 이렇게 힘들까를 고민했었다. 묵직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사주 보는 곳에서 찾을 줄은 몰랐다. 모자란 것일 뿐, 아직 덜 찬 것일 뿐, 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계속 뭔가를 하며 살고 있으니 잘 쌓이고 있을 거라 믿게 되었다. 나목은 봄을 기다리는 느린 나무였다. 긴 겨울의 끝이 겨우 보였다.
나무에 동물과 곤충들이 모인다. 나도 학생들과 함께 살아간다. 교사는 뭔가 듬직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교사는 아니다. 아직 삐쩍 마른 구석이 남아 있다. 학생들이 나의 실수로 웃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규 때는 카리스마가 필요한 것 같아 괜히 몸에 힘주고 교실에 들어가곤 했었는데 그런 나를 살펴보시던 부장님께서 웃으시며 나를 부르셨다. "그냥 학생들에게 지고 말아. 그게 더 어울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다시 생각해보면 학생들도 '카리스마' 있는 나를 무서워하진 않았던 것 같다. 모두 알고 있는데 나만 몰라 한동안 '카리스마' 교사로 지냈다.
나무같이 사는 삶이 답답할 때도 있다. 제일 잘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지만 제일 싫어하는 것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려야만 쌓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까워 속에 있는 오지랖이 올라온다. 학생을 기다리는 것도 교사가 할 일이다. 빨리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천천히 지켜본다. 그러다 답답해지면 가끔은 학생이 해야 할 것을 대신해 준다. 바보같이. 명백한 월권이다.
사주를 볼 줄 아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에게 학생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니 웃으며 말했다. "나무는 편안한 장소를 제공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나무가 지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욕 같아 보이는 말에 순간 욱하긴 했지만 여운이 남았다. 학생의 문제를 내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지혜가 없다. 여러 번 곱씹어도 기분 나쁜 말이지만 또 묘하게 나를 편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조금은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같이 있으면 편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럴 때마다 한 것 없이 칭찬받는 것 같았다. 조금씩 쌓아 올린 것만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지식함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나에게 칭찬은 미안함과 공허함이었다. 괜히 살이 빠졌다. 나무가 말랐다는 건 그만큼의 쉴 공간을 못 만들었다는 뜻이다. 칭찬하는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사람도 내 곁에서 쉬지 못한다. 좋은 마음으로 함께 놀자고 오는 곤충과 동물들에게 뾰족하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융통성 없이 쌓는 것에만 신경 쓰는 나무에게 친구들이 와서 주변에 있는 예쁜 경치도 구경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름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줄기가 튼튼하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큰 나무 밑 그늘진 곳에 누워 있는 나를 상상한다. 뿌리를 베개로 삼고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자니 내가 나무 같고 나무가 나와 같다. 그대로 한숨 푹 자고 나면 진짜로 여름 나무가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마무리해야겠다. 잘 자면 키 큰다 했으니 일찍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