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 리쿠<<밤의 피크닉>> 책을 읽고
걷는 사람들은 길을 살핀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산길은 시간에 따른 변화가 더 뚜렷하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학교 뒷산은 그래서 늘 새롭다. 요즘은 걷기 좋은 계절이다. 여름의 여운과 가을의 기운이 섞여 새로운 색감을 만들어내고 시원한 바람과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촉감과 청각을 자극한다. 산길을 걸으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글로 다 담아내지 못해 감질이 난다. 걸으며 눈으로 본 길을 사진 찍듯 글에 담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에 걷기 수업에 대한 내 글을 읽고 브런치 친구인 오월나무 작가님께서 <<밤의 피크닉>>이란 책을 소개해주셨다. 걷는 것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은 없어 호기심이 생겼다. 작가인 온다 리쿠와 걷기에 대한 토론을 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일본 고등학교에서 매년 마지막 행사로 스물네 시간 동안 밤을 새워 80킬로미터를 걷는 '야간보행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고등학생이고, 11월에 학교 뒷산 정상을 가기로 계획이 잡힌 상태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 기대했다.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 1미터 걷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어 지는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 분 일 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느 하루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농밀하며 눈 깜짝할 사이였던 이번 한 해며, 불과 얼마 전 입학한 것 같은 고교생활이며, 어쩌면 앞으로의 일생 역시 그런 '믿을 수 없는' 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은 누가 지은 걸까. 이 속담 속에 걷기의 모든 것이 들어 있어 몇 번을 되뇌게 된다. 하루 동안 80km를 걸어야 하지만 모든 학생들은 한 번에 한 걸음씩 움직일 뿐이다. 지겨워 보이는 한 걸음의 무한 반복을 작가는 총 362쪽에 걸쳐 표현하고 있었다. 똑같은 움직임 같아 보이지만 발자국마다 무게가 달랐다. 작가는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발자국을 따라 그대로 학생들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처음은 60km의 단체보행 길이었다. 오전에 학교를 출발하여 새벽 2시에 임시수면소에 도착했다.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 분명했다. 대부분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길을 걸었다. 발걸음이 점점 쌓여 피로감이 몰려오면 일 분이 수백 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수시로 변하는 발걸음의 무게는 이 소설의 핵심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길 위에서 몸과 마음을 발걸음에 담아 끝없이 걸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수시로 들었지만 포기하려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한 걸음의 무한 반복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임시수면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새벽 4시부터 나머지 20km를 걷기 시작했다. 자율보행 길이었다. 학생들은 각자의 속도로 길을 떠났다. 다카코도 다시 시작했다. 걸으면서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99%까지 쌓였지만 마지막을 미와코와 함께 하고 싶은 1%의 마음이 다카코의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마음이 지친 몸을 이끌었고, 지친 마음을 서로가 이끌어 주었다. 일 분 일 초가 연결되어 있듯이 모든 것이 연결된 시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워질 때쯤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서로에게 무장해제된 채 속에 있는 마음을 드러냈다. 용기가 아니라 피곤해서 마음을 묶어둘 힘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마음에 힘 좀 빼고 지내도 되는데 괜히 쓸데없는 힘을 쓰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번 힘을 빼고 나니 담아뒀던 말이 쉴 새 없이 나왔다. 마음이 가벼워지며 몸도 따라 가벼워졌다.
"눈 깜짝할 새였구나."
도오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가?"
다카코는 무뚝뚝하게 묻는다.
"보행제."
"응."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부터 줄곧 보행제 생각을 하잖아. 생각한다고 할까. 내내 신경 쓰이잖아. 그런데 실제로는 겨우 하루, 다리가 아프니 힘드니 투덜거리기만 하다 끝나고 마네."
"그러게. 시작하기 전에는 좀 더 극적인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저 걷는 것뿐이라 별다른 것도 없고, 대부분은 힘들어서 아주 질려버리는데, 지나고 보니 즐거웠던 것밖에 생각이 안 나."
"맞아, 맞아."
"그래서인지 수학여행보다 이게 더 좋아. 졸업한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는 거 이해하겠어."
"응. 나도 이쪽이 더 좋아."
특별할 것 없는 대화가 편안했다.
모두 같이 밤새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왜 이렇게 특별한 것일까.
나란히 함께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신기하네. 단지 그것뿐인 것이 이렇게 어렵고, 이렇게 엄청난 것이었다니.
도오루와 다카코는 특별할 것 없는 대화를 하며 보행제를 끝냈다. 실컷 걷고 난 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작가는 걷기를 하얀 쌀밥같이 생각했을 듯하다. 크게 맛이 없는 밋밋한 쌀밥이 김치를 만나 입맛을 돋우고 나물과 어울려 비빔밥을 만들어 낸다. 두 사람도 걸으며 처음으로 서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걷는 것이 복잡했다면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씹을수록 고소한 쌀밥처럼 걸을수록 담백해진 그들의 관계가 참 맛있게 보였다.
내가 책 읽는 과정도 쌀밥과 비슷했다. 조금은 밋밋한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점점 고소해지는 맛에 오늘 하루 종일 책을 붙잡고 있었다. 작가도 분명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걸으며 보고 듣고 느꼈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 소설을 만들었을 것이다. 주인공 다카코의 발자국 속에 작가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담백하게 표현을 했다고 생각한다.
11월이 되면 학생들과 함께 뒷산을 끝까지 올라간다. 그 시간은 얼마나 고소할지 벌써 기대가 된다. 책을 읽고 나니 산행을 학생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다. 함께 보고 걷고 느끼며 크게 특별하지 않는 산행을 하고 싶다. 가을산을 꾹꾹 밟으며 내 마음도 발자국 속에 잘 담기길 바란다. 밤의 피크닉은 아니겠지만 산속 피크닉 정도는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