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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Nov 15. 2022

한국에 사는 고려인

외국인일까, 한국인일까

2022년 가을, 우즈베키스탄 국적을 가지고 있는 고려인을 만났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이주를 당했던 사람의 후손이었다.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러시아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를 사용하는 고려인 선생님의 눈빛은 강하고 독립적이었다. 수업 시작부터 6500km의 거리에 마음이 압도되었다. 여러 문화를 깊이 있게 경험해보기 위해 마련한 사람책 수업이었는데 문화를 알려면 역사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 고려인이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게 된 이유부터 설명해주셨다. 일제강점기의 이야기가 오늘까지 이어져 선생님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1937년, 소련의 극동 지역에 살던 약 17만 명의 고려인들이 6500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인과 외모를 구분할 수 없어 일본 스파이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당시 소련 정부의 우려 때문이었다. 40일 정도를 기차 짐칸에서 버텨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기차가 서면 군인들은 죽은 사람들을 솎아내어 길거리에 버리고 다시 출발했다. 먹을 것도 화장실도 하나 없는 짐칸에서 짐처럼 그 시간을 견디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제이주라는 말보다 이 사건에 더 적합한 말이 있을까.


2022년 현재도 고려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약 250여 개의 민족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각 민족의 특성은 다르지만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므로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하다. 다른 민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무슬림 문화권이지만 다른 종교도 함께 공존한다. 수업을 들으며 그야말로 문화 다양성을 인정하며 사는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선생님은 우즈베키스탄에도 '다문화 가정'이란 말이 없다고 하셨다. 베트남 선생님께서 지난주에 말씀해주신 부분이라 좀 더 마음에 와닿았다. 선생님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다문화 가정'이란 틀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했다. 문화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부터 배워야 할까. 일단 입에 붙은 '다문화'란 말부터 떨궈내야 하지 않을까.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17년째 한국에 살고 있어요. 처음에는 한국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죠. 한국어를 하지 못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듯해서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래서 돌아갈 땐 가더라도 여기서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죠. 언어를 배우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교회에서 사람을 만나 한국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했지요. 노트를 들고 다니며 하루 종일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적었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혼자 다시 공부를 했습니다. 어려웠지만 못할 일은 아니었어요. 한국어가 느는 만큼 한국 생활도 적응이 되어 갔던 듯해요."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 선생님은 한국어를 배우며 그 속에서 문화를 받아들이셨다. "밥 먹었어?"라는 말을 한국인에게 처음 들었을 때 '이건 뭐지?' 싶으셨단다. 굳이 남이 밥 먹은 것까지 궁금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굳이 왜 물을까.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도 해 주셨다. 한국인 친구를 우연히 만나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언제 밥을 먹을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밥 먹을 약속을 잡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빈말 같이 느껴졌지만 후에 한국 사람들이 못 살았을 때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제야 친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선생님의 경험을 들으며 문화 간 차이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어 재미가 있었다. 그러게. 남이 밥 먹는 것까지 챙겨야 할 이유가 있나.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외국인이에요. 그곳에 살지만 뿌리는 한국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한국에 와서 보니 여기서도 고려인은 외국인이더라고요. 문화가 다르니까요. 한동안 나의 뿌리를 찾지 못해 많이 힘들었어요."


6500km의 거리가 선생님의 마음속에도 있었다. 자신의 뿌리는 무엇이며 어디에 정착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서 선택하는 삶을 사셔야 했다. 어려운 문제였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다. 분명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못할 것은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민 끝에 선생님이 뿌리내린 자리는 우즈베키스탄과 한국 중간이었다. 우리는 보통 모 아니면 도를 좋아하지 않는가. 선명하지 않은 중간은 늘 불안함이 뒤따른다. 선생님은 인생이 모두 뜻대로 되진 않는다는 말씀을 덤덤히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두 문화의 중간에 있음을 받아들이셨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은 고려인의 모습을 역사책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다양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시기 바로 전까지도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셨다. 자신의 인생이 크게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생님의 삶을 통해 잘 모르고 지나칠 뻔한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기억할 수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고려인은 낯설었다. 조선족은 많이 들어봤지만 고려인은 조선 시대 이전의 사람들을 말한다고 생각할 만큼 무지했다.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실감한 것은 우리 사회가 고려인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무관심에서 오는 마음의 거리는 어쩌면 6500km보다 더 멀지도 모른다. 고려인은 한국에서 외국인일까. 한국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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