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의 밀당

글쓰기 : 그냥 써라

by 마나

나는 짝사랑 중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 애를 쓰고 있다. 내 사랑이 안정적이면 좋으련만, 상황이 매번 롤러코스트를 타듯 하니 매력적인 만큼 불안정하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은 내가 가진 내공이 부족한 탓이다. 짝사랑에도 나름의 밀당이 요구된다. 혼자 하는 사랑이라 두 사람 몫의 에너지가 든다. 상대가 크게 동요가 없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밀당 없이 편안하게 사랑만 할 수 있을까.


요즘은 백지 앞에서 홀로 전투 중이다. 글을 쓰기 위해 열심히 글자를 당기고 있긴 한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백지는 내가 모은 글자를 모두 튕겨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글이 새겨지지 않아 애가 쓰인다. 백지는 원래 이렇게 변덕스러운 걸까.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글쓰기의 세계는 짝사랑의 설움을 느끼기 딱 좋은 시간이다. 자세히 보면 나도 나름의 매력이 있을 텐데 백지는 심통이 났는지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등을 돌리고 있다. 현실이 내 마음 같지 않아 답답할 노릇이다.


지난 5개월간은 신나게 글을 썼었다.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백지 속에 들어 있는 숨은 글 찾기에 빠져들었다. 삶을 그냥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하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지고 일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세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좋은 일도 싫은 일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글을 쓰며 알아갔다. 그래서 글쓰기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고마움이었다. 소극적인 내가 조금은 용기를 내어 세상 밖 놀이터에서 놀 수 있게 해 주었다. 세상을 내 속도로 만져보고 기록할 수 있어 좋았다. 모든 것을 다 담을 필요가 없어서 부담도 없었다. 백지는 편안하면서도 재미있는 친구였다.


가끔 글쓰기가 힘들다는 글이 브런치에 올라올 때 나는 완전히 공감하지 못했다. 하루 24시간 중 인상적이었던 1분만 찾아낼 수 있다면 적을 수 있는 글감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24시간은 길었고 그중 1분을 찾아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예쁜 글감을 주워다 글로 옮겨 놓기만 하면 되는 꽃동산에 있었다. 힘든 글쓰기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이없는 내 모습을 보며 백지가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순식간에 변한 백지 앞에서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러려니 하고 며칠을 쉬기도 해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백지를 쳐다보았을 때에도 여전히 냉랭한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더 당황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정다감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내게 등을 돌리고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듯했다. 당황스러움은 외로움으로 바뀌었고 결국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글을 편안하게 쓰기 위해 그렇게도 기다리던 방학이었는데 쉬는 것도 쉬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책꽂이에 꽂힌 책들만 바라보며 멍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새벽 햇살>

글을 편하게 쓰지 못한 지 1달이 넘었다. 친구는 잘 쓰려고 하지 말고 그냥 써라고 했다. 머릿속으로는 맞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마음으로 소화시키지 못해 오늘도 약간은 침울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에 창밖을 보니 햇살에 아파트 일부분이 반짝이고 있었다. 새벽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아 반사된 부분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아침 풍경을 보며 백지 속에 숨어 있던 글들이 조금씩 보이는 듯한 착각을 했다. 움츠러들지 않고 싱긋이 웃으며 다시 백지를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새벽 햇살을 담은 사진을 백지 위에 놓아두고 글을 적기 시작했다. 살짝 떨리긴 했지만 그래도 글자들이 백지 위에 잘 안착되었다.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재미를 느끼면서 조금씩 초심이 사라지고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조바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재미는 의무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내게 주제넘지 말라고 백지가 애정 어린 차가움을 보여줬던 것은 아닐까 싶다. 새벽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던 오늘, 계절에 맞지 않게 시원한 냉수마찰한 듯 머리는 시원했고 마음은 따뜻했다. 아직도 어색한 백지와의 시간을 이제는 덤덤히 받아들일 생각이다. 어쩌면 나는 짝사랑을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새침한 백지의 행동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차가움도 사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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