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초
지난해 수확한 콩을 올해도 다시 화분에 심었다. 금세 싹이 트고 잎이 났다. 콩을 보고 있으면 말 그대로 쑥쑥 자라는 것이 느껴진다. 콩들은 누가 더 열심히 사는지 경쟁하는 것에 재미를 붙인 듯하다. 출근할 때는 멀쩡하게 잘 서 있던 한 녀석이 퇴근하고 오니 그새 더 자란 제 키에 스스로 버거워 누워 있다. 지지대 하나를 꺼내서 옆에 꽂아주고 의지할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줬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묻고 싶었다. 그들이 아는 세상은 내가 내어준 작은 화분이 다일 텐데 그 속에도 나는 모르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나 보다. 나는 콩의 언어를 모르고 콩은 나의 언어를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궁금해하고, 또 무시하며 지내는 관계로 편안하게 동거 중이다.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서로의 자리를 인정해 주는 거리가 자연적으로 생겨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는 것, 길고 가는 줄기가 계속 서 있을 수 있도록 지지대를 설치해 주는 것이 다다. 그 외에 잎을 만들고 콩꼬투리를 만드는 과정은 온전히 콩의 몫이다. 그러면서 생겨난 우리들만의 규칙이 있다. 검은 콩이 싹을 틔운 뒤 처음 연둣빛 잎을 만들어 낼 때 검은 모자는 머리에서 스스로 벗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손발 없이 머리만 있는 콩이 어떻게 검은색 모자를 벗겨내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내가 출근한 후 서로 머리를 비벼 해결할지도 모를 일이다. 간혹 검은 모자를 계속 쓰고 답답하게 있는 경우가 있어 손가락이 있는 내가 오지랖이 발동할 때도 있지만 내 영역이 아니라 생각해서 꾹 참는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철저히 혼자 하게 두는 것이 우리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이다.
콩들은 무섭게 자라고 있다. 새벽이 되면 잎을 세워 하루를 살 준비를 하고 저녁이 되면 잎을 늘어뜨려 잘 준비를 한다. 처음 콩을 키울 때에는 저녁에 잎이 처져 있는 것을 보고 걱정을 했었다. 혹시 아픈 것이 아닌가 싶어 물과 영양분을 더 줬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보다 더 생생하게 잎을 펴고 햇볕을 향해 있는 게 아닌가. 식물도 저녁에는 쉰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콩의 언어를 하나 알게 된 날이었다. 하긴, 그렇게 쑥쑥 자라려고 애를 쓰는데 쉴 때는 쉬어야지. 그들도 무뚝뚝하게 서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고 나름 말을 걸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함께 지내는 느낌이 났다.
아침에 화분을 보는데 작은 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콩들은 이미 잎이 많이 나고 키도 제법 컸는데 새싹처럼 작은 것이 아직 첫 잎도 밖으로 내지 못한 상태였다. 검은 모자를 벗겨낼 힘도 없어 그대로 뒤집어쓴 채로 겨우 힘을 내어 자라고 있었다. 뒤늦게 싹이 튼 건지 아니면 원래 약한 건지 나는 모른다. 무심한 내 눈길은 오늘이 되어서야 그 콩을 발견하고 안쓰러움을 느낄 뿐이었다. 검은 모자를 한참 쳐다봤다. 모자 사이로 보이는 연두색 머리의 빛깔이 건강하지가 않았다. 어디가 불편한지 알 수 있다면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자라는 일은 콩이 해야 할 일이라고 선을 그은 우리만의 쿨한 규칙이 불편하게 느껴진 순간이었지만 내 마음과 달리 콩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작고 고요했다.
규칙은 규칙이니 검은 모자를 두고 돌아서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혼자서 잘하겠지'라는 억지로 떠올린 생각 밑으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방치의 느낌 때문이었다. 함께 시작했는데 늦게 자라고 있다면 그것도 몸으로 나에게 신호를 보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약하지만 열심히 올라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열심히가 이렇게 차이가 난다면 내가 그 콩에게도 혼자서 스스로 모자를 벗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맞을까. 더 자세히 콩을 쳐다보았다. 모자 속에 머리가 꽉 끼어 있는 듯했다. 숨은 쉬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손가락을 검은 모자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규칙을 어기고 처음으로 검은 모자를 내가 벗겨줬다. 작은 연두색 머리가 보였다.
콩을 도와준 것인지 오지랖을 부린 것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대화가 되지 않는 우리는 이 새로운 상황을 각자가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선 넘는 일을 저지른 입장이었다. 며칠을 두고 작은 콩의 움직임을 살펴볼 생각이다. 그 속에 분명 나에게 줄 신호가 들어 있을 것이다. 고마웠을 수도 있고 귀찮았을 수도 있다. 속사정이 어떻든 조금만 더 크면 곧 화분을 넘어선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니 힘을 내서 올라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덩치 큰 친구들 사이에서 작은 친구가 힘을 내고 있다. 세상이 무섭지 않을까 싶어 괜히 마음이 쓰이는 건 그 작은 모습 속에 내가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아도 괜찮다고, 늦게 올라와도 괜찮다고, 아직 봄은 완전히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속삭여본다. 진짜 괜찮으니 조금씩 올라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