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를 수정하다
글을 쓸 때 제일 신경을 쓰는 시간은 초고를 수정할 때이다. 뭔가를 덧붙이기보다는 덜어내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나는 혼잣말로 글을 청소하는 시간이라 말하곤 한다. 과장된 표현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조금만 방심해도 포장된 글을 적고 마는 까닭이다. 글을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살핀다. 초고부터 담백한 글을 적는 것은 인정욕구를 이길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깜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나는 처음 글을 쓸 때보다 수정을 할 때 더 집중할 요량을 한다.
가끔은 글을 수정하고 나면 남는 게 없어 거의 처음처럼 다시 적는다. 누가 시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이럴 땐 괜히 허무하다. 약간의 과장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와 협상도 하고 싶어진다. 초고를 읽고 있으면 내가 보인다. 글도 잘 쓰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도 싶은 마음이 부풀어진 표현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나는 나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날것의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글쓰기이다. 시작을 인정하지 않으면 끝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에 수정 시간이 있는 것은 초고의 어설픔을 인정해 준다는 뜻 아닐까. 미운 모습도 괜찮다는데 편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말보다 글을 더 선호하는 이유다.
괜찮다는 말이 글을 초고로 마무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내 모습을 인정하되 조금씩 다듬어 보자는 의미를 포함한다. 글을 다듬으며 내 생각도 다듬는다. 왜 나는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지를 생각한다. 과장된 표현이 꼭 나쁜 건지도 따져본다. 수정은 나쁜 것을 없애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유를 찾아가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허풍도 쓸모가 있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적절한 곳에 들어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을 거쳐 지울 것인지 놔둘 것인지를 판단한다.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나와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솔직하지 못한 글은 읽을 가치가 없고 담백하지 못한 글은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내가 쓴 초고를 읽을 때마다 허풍쟁이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내 글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걸까. 나의 본모습과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초고와 완성본 같다. 그렇다면 허풍쟁이가 솔직한 나이고 완성본 속에 든 내가 허상이 아닐까. 솔직하지 못한 모습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담백함이 없는 글은 대신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틀이 조금씩 깨어진다. 글만 교정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삶을 정리하며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모든 순간은 지나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를 기억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내 글의 첫 독자는 나이다. 그리고 마지막 독자도 내가 될 거라 생각한다. 나의 인생이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게 정리된 집과 같길 바란다. 훗날, 오늘 썼던 글을 다시 읽을 때,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그것을 기록하는 글도 나라는 사람과 닮았다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 독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희망을 담아 오늘도 글을 수정한다. 나는 여전히 담백한 글을 쓰길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이제 조금은 덜 섭섭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