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깼다. 자기 전 느꼈던 우울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어난 지 1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공격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싶었다. '꺼져!'라는 말을 몸을 뒤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시 자면 어두운 친구와 대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꺼져버린 건 우울감이 아니라 잠인 듯 점점 정신이 뚜렷해졌다. 다시 자는 것을 포기하고 어두운 천장만 바라보았다. 아직 새벽 3시도 되지 않았는데 밖에서 포클레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누구는 일을 하고 나는 누워 있다. 누가 봐도 밖에 있는 사람이 더 힘들 것 같은데 누워 있는 내가 더 힘들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새벽이지만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요즘 들어 마음이 안정이 안 됐다. 무엇이 원인인지 찾고 있지만 한 가지만은 아닌 듯하다. 너무 큰 세상에서 작은 내가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으니 가끔씩 불안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살기 바빠 마음 챙길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그 부족함이 쌓여 나는 우울해졌다. 다행히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숨 쉬게 협조를 해주지만 퇴근 후에는 얄짤없었다. 집에서는 나를 그냥 두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초저녁부터 잠을 잤다. 새벽에 잠을 깨는 건 잠을 잘 못 자서가 아니라 자야 할 잠을 다 자서일 것이다. 그래도 일어나기는 싫어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천장이 지루해질 때쯤, 머릿속에서 다음 영어 수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학생들은 이제 겨우 조금씩 영어에 관심을 가져보려고 한다. 아직 갈 길이 멀어 한 발 움직이는 것도 조심스럽다. 생각한 여러 활동 중에서 올해 학생들에게 적절한 것을 찾고 싶은데 쉽지 않다. 자유학교에서 근무한 지 6년째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첫 해인 듯 수업 때문에 방황하는 나를 보는 것이 당황스럽다. 그러다 문득 횟수를 세는 내가 꼰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꼰대는 참을 수 없지. 당장 생각을 멈추었다.
대신 법륜 스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 "넘어졌으면 그냥 일어나라. 횟수를 세지 마라. 또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넘어진 것이다." 맞는 말씀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반박을 했다. 여전히 위축되어 있는 나를 보며 스님은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학교에서 몇 년을 있은 게 뭐가 중요한가. 매년 바뀌는 학생들에 맞춰 수업이 달라지는 것이니 매년 첫 수업인 것이다. 수업이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지. 늘 좋기만을 바라는 것은 욕심 아닌가. 자신을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지 마라."
스님은 어렵게 애쓰며 말을 꺼낸 나와는 달리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셨다. 시원한 냉수 한 잔 마시고 나니 잠이 더 깼다. '쳇, 괜히 욕먹었네' 싶으면서도 체증이 내려가는 듯 가벼워짐을 느꼈다.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생각한 영어 수업을 정리해서 메모를 했다. 다음 시간을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으로 돌려보니 나쁘지 않았다. 일을 마무리하고 옆에 있는 어두운 친구를 쳐다보았다. 아침이 밝아오는지 옅어진 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성가시거나 무섭진 않았다. 네가 나를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구나 싶었다. 지쳐있는 나에게 조금 쉬라고 말하고 싶은데 계속 몰아치기만 하니 나에게 더 가까이 온 거였다.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친구도 졸린 눈을 비비며 웃어 주었다. 내 새벽잠이 친구에게로 다 간 듯했다.
새벽 5시가 넘어갔다. 친구는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는지 내 침대가 자기 침대인 양 누워 있다. 왜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더 있을 것이다. 어둡긴 하지만 나를 해칠 친구는 아니었다. 아마도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남았을 것이다.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조바심 내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이 밝아오지만 아직 나는 어두운 새벽이 더 좋다. 검은 이불 덮고 나도 좀 자야겠다. 다시 일어났을 땐 어제보다는 좀 더 깊어진 눈으로 친구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