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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May 30. 2023

가족과 시간

주말에 가족들이 모였다. 뒤에 있던 엄마가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손가락으로 사이사이를 들춰보셨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그만두지 않고 계속 반복하는 엄마의 손가락을 느끼며 쓰다듬는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흰 머리카락 있어?" 엄마는 빙긋이 웃으며 나중에 뽑아주겠다고 하셨다. 엄마의 웃음 속에 딸 앞에 찾아온 노화에 대한 걱정과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이 겹쳐 보였다. 나도 따라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가족의 중심엔 당연히 7살 된 조카가 있었다. 조카는 아빠 엄마를 번갈아 쳐다본 후 할아버지 할머니를 또 쳐다봤다. 그리고 큰고모, 작은고모와 무엇을 하며 놀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민했다. 조카의 시선에 따라 내 시선도 움직였다. 3대가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이 조카의 눈을 통해 내 마음에 새겨졌다. 훗날, 조카가 커서 삶에 힘겨워할 때, 많은 사랑이 모두 조카에게로 모였던 순간이 있었음을 이야기해줘야겠다 싶었다. 조카는 오늘만 남은 것처럼 놀았다. 고모들도 그 오늘에 동참했다. 꼬맹이는 우리를 따라 하고 우리는 꼬맹이를 따라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틀 동안 놀이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날 저녁 거울을 보며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로 넣었다. 한 올 한 올을 유심히 찾아봤는데 엄마가 봤던 머리카락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지 알 수만 있다면 엄마에게 다시 머리를 들이밀지 않아도 될 텐데. 혼자 답답해하다가 이내 엄마가 잘못 봤을 수도 있을 거란 억측과 희망을 섞으며 흰 머리카락 찾기를 포기했다. 다행히 조카는 고모가 딴 곳에 집중할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7세와 놀고 있는 한 나도 7세였다. 내게 더 이상 나이나 흰 머리카락 따위에 집중할 시간이 없어 좋았다. 


주말은 정말 쏜살같이 흘러갔다. 동생집에 들어갔다가 눈만 껌뻑하고 바로 나오는 느낌으로 다시 공항으로 출발했다. "왜"의 덫에 걸린 조카는 왜 자신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가지 못하는지에 대한 불만을 자기만의 언어로 계속 재잘거렸다. 어리다고 헤어짐의 슬픔이 옅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조카는 그렇지 않은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주말이 지나가는 속도로 보아 조카의 사춘기 시절도 금방 찾아올 것이다. 그땐 왜 주말에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이 오는지를 묻지 않을까. 우리는 그때가 되면 또 그때대로 조카를 받아들일 준비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조카를 통해 하는 중이라 생각한다. 만남도 헤어짐도 모두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동생네 식구들과 헤어지고 나는 다시 남아 있는 식구 중 막내가 되었다. 그제야 엄마가 찾던 흰 머리카락이 생각이 났다. 나는 엄마 대신 좀 더 만만한 언니에게 머리를 들이댔다. 언니는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한 가닥을 뽑아 그대로 버렸다. 나는 왜 머리카락을 보여주지도 않고 버리냐며 언니에게 물었고 언니도 엄마처럼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만병통치약인가 싶었다. 순간 따끔했던 두피의 고통도 사라지고 보지 못한 흰 머리카락의 모양도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나도 따라 웃었다.


세월이 흐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듯하다. 안타깝긴 하지만 조카가 말이 느는 속도가 흰 머리카락이 생기는 속도보다 더 빠른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동생의 머리카락에도 흰색이 종종 보인다. 나는 여태 알은체하지 않았다. 다음에 말할 기회가 있다면 나도 엄마의 웃음을 따라 할 요량이다. 가족은 무엇이길래 내 흰색보다 너의 흰색에 더 말 못 하는 걸까. 말 못 하는 것을 웃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잘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주말이 끝났다. 조카가 제법 커서 반짝 육아의 후유증이 예전보다는 덜 하다. 학교로 돌아와 일을 하면서도 동그란 얼굴과 그 주변에서 같이 웃고 있는 식구들의 표정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혼자 웃으며 조카의 "왜" 음악을 듣는다. 시간이 심술을 부려 점점 더 빨리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조카의 지휘 아래서 우리는 우리만의 속도로 삶을 살 것이다. 혼자 또 같이, 함께 또 혼자 시간을 채우고 합치며 조카의 음악에 가족의 연주가 잘 어우러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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