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중
콩꽃이 피었다. 새끼손톱 크기보다 작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서툰 내 눈에라도 띄어줘서 고맙다. 혹시 놓치고 있는 다른 꽃이 있나 싶어 콩을 심어 놓은 두 화분을 열심히 훑었으나 꽃 필 시기가 아닌 건지 다른 꽃은 없었다. 각도를 잘 잡아 사진을 찍는다. 실제 꽃의 아우라를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어 아쉽다. 예쁜 꽃을 보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아무래도 작년에 콩꽃이 피고 지는 것을 모두 본 후라 그럴 것이다. 반가운 만큼 슬픔이 올라온다. 희고 작은 꽃은 곧 어미로 변해 그 속에서 콩꼬투리를 키워내며 시들어갈 것이다. 오늘의 꽃이 너무 아기 같아 더 안쓰럽다. 예쁜 것을 예쁜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꽃도 좋아하지 않을 이 마음이야말로 오지랖이 아닐까 싶어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리고 꽃을 다시 본다. 새하얀 꽃이 앙증맞다. 만져보고 싶지만, 너무 작아서 만지지 않기로 한다. 콩꽃이란 이름은 누구 엄마라고 불리는 호칭 같아 본모습을 다 담지 못하는 듯하다. 그 이름 너머에 꽃이 있다. 꽃은 꽃 자체만으로 예뻤다.
콩을 어떻게 키우는 것이 좋은지도 모른 채 지난 몇 년 동안 콩을 키우고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콩은 잘못하면 웃자라기 때문에 적절하게 잘라줘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버르장머리 없이 제멋대로 크는 콩을 보고 싶었다. 웃자라고 싶으면 실컷 웃자라라. 콩의 틀은 화분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예의범절이나 도덕성 따위를 가르치고 싶진 않았다. 콩은 어떻게 하면 콩으로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콩은 씨앗으로 시작해 뿌리가 생기고 줄기와 잎을 내며 꽃을 피운다. 꽃은 다시 콩꼬투리를 만들고 그 속에 다시 씨앗을 만들어낸다. 크게 어긋남이 없는 삶이다. 내가 콩꽃을 안쓰럽게 여길 이유가 뭘까. 콩으로 생겼으면 원숭이 인생을 바라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콩은 움직이지 못한 채 화분 속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뿌리를 내린다는 건 한 곳에서 자리를 잡겠다는 뜻이다. 두 다리가 있다는 건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태어난 생김은 태어난 이유만큼이나 생각할 필요가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생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 콩을 다시 본다. 화분 속에 있는 콩이 답답할까 애써 마음 쓰는 것마저 오지랖이라는 것을 알겠다. 나의 오지랖은 어디까지일까.
작년에 수확한 콩은 아까워 먹지도 못했다. 보관해 두었다가 올해 다시 심어 새로운 콩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계절이 여름으로 변해가면서 콩은 겁도 없이 태양을 향해 웃자라고 있다. 물만 주면 자라는 콩이 신기해 광합성에 대한 공부를 했다. 이산화탄소와 물만으로 포도당과 산소를 만들어내는 것이 콩이 살아가는 비법이었다. 나는 콩에게 물을 주고 옆에서 열심히 밥을 먹었다. 광합성을 할 능력을 갖지 못한 한낱 인간은 매일 주기적으로 포도당과 영양분을 입속에 넣어줘야 한다. 콩을 보며 광합성 능력을 지닌 콩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내가 콩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콩이 나를 키우는 듯했다. 인간이 콩의 인생을 바라서는 안 된다. 인간은 뿌리도 줄기도 잎도 없다. 광합성 능력이 없어 대신 소화 능력을 준 것이다. 다들 살아갈 만하니까 그렇게 생긴 것이다. 안쓰러워할 일도 우쭐할 일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생긴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콩은 되는데 나는 안 돼서 오늘도 오지랖을 부리고 반성하고를 반복하고 있다. 이것 또한 내 인생이라면 오지랖까지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어제 아침에는 콩이 태양이 있는 쪽으로 너무 기울어져 자라고 있는 것 같아 화분 방향을 바꿔주었다. 창밖으로 목을 쭈욱 빼고 있던 콩잎들이 다들 방안으로 몸을 틀어 있는 것을 보니 나를 봐달라고 위치를 옮긴 것 같아 괜히 머쓱했다. 조금 혼란스럽겠지만 똑똑한 콩이니 곧 몸을 틀어 빛을 찾아낼 거라 믿었다. 이틀이 지난 저녁이다. 콩은 원래 자세가 기울어진 적이 없었다는 듯 빛을 향해 꼿꼿하게 등을 펴고 잎을 뻗고 있다. 참 신기한 생명체다. 며칠 뒤 자세가 또 너무 기울면 나는 화분 방향을 바꿔줄 것이다. 이것만은 오지랖이 아니라 너무 가늘어 목을 가눌 수 없는 웃자란 친구를 도와주는 것으로 여겨주면 좋겠다.
나는 콩을 왜 키우고 있을까. 처음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몇 년째 계속하고 있으니 이유나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콩은 하루도 똑같은 적이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름에 빠져 하루를 보냈을 때도 잔소리 하나 없이 묵묵히 자기 삶을 내게 보여준다. 아마도 나는 그의 과묵함을 사랑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의 오지랖과는 다른 묵직함은 나를 스스로 일어나게 만들어 준다. 콩은 뭘까. 뿌리, 줄기, 잎, 꽃, 꼬투리, 씨앗 모두가 콩이다. 이것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각자가 희생만 하는 것만 같아 쓸데없는 오지랖이 올라오지만 그저 한 몸으로 생각하면 환상적인 인생이다. 내가 두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하더라고 내 팔을 불쌍히 여기진 않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누굴까.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모두가 나다. 그냥 나는 나로, 콩은 콩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오지랖도 사라지고 각자가 모두 자유로울 것이다. 나는 오늘도 콩을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잡생각이든, 반성이든 끊임없이 생각하며 산다. 과묵한 내 친구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래서 나는 콩을 키우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