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말
오늘도 새벽에 눈을 떴다. 전날 무리한 탓에 약간의 두통을 안고 잤는데 자고 일어나도 머리가 개운치 않았다. 좀 더 자면 나을 텐데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밴지라 몸은 이미 깨어나고 있었다. 하긴 저녁 9시만 되면 잠이 오기 시작하니 새벽이라지만 일찍 일어나는 거라 말할 수도 없다. 얼마 전 샀던 알람시계가 있어도 나는 대부분 시계를 앞선다. 조금 미적거리다가 고함 같은 알람 소리는 듣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노는 것 하나는 기똥차게 잘하는 나에게 새벽은 놀이터다. 보통 때 같으면 출근 준비하기 전까지 남은 2시간 정도를 뭐 하며 보낼지 신나게 고민할 텐데 오늘 새벽은 무거운 머리 탓에 책상 앞에 앉아 이리저리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장마라 비가 계속 내렸다. 빗소리를 따라 아무것도 할 것 없는 한량처럼 창가를 쳐다보았다.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콩 화분 두 개가 거기 있었다. 작년보다 더 크고 길게 자란 콩잎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작은 깻잎 같았다. 커진 잎의 크기만큼 콩 수확에 대한 기대감도 올라가는 중이었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것이 심심했다. 가까이 다가가 콩잎을 한장 한장 살폈다. 제일 윗부분에 거미줄 같은 것이 보였다. 벌레를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먼지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볼수록 거미줄과 닮아 있었다. 주변 잎에는 작은 점들이 보였다.
원래 이런 게 있었나 싶었다. 매일 보던 콩인데 언제 이렇게 거미줄이 생기고 점들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햇볕을 많이 쬐면 피부에 점이 생기듯이 콩잎도 그런 건가 싶었다. 물은 주되 콩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콩의 변화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어 답답했다. 다른 화분의 콩을 살펴보았다. 이쪽은 잎에 점이 보이지 않았다. 화분 두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하나는 점이 있고 다른 것에는 없었다. 도대체 이것이 뭘까를 생각했다. 일단 거미줄 같은 것이 싫어서 화분을 화장실로 가지고 가서 물을 뿌렸다. 콩이 물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나름 깔끔해진 잎을 보며 안심을 했다. 화분에 물기를 뺀 후 다시 제자리로 옮겼다.
축 쳐진 콩을 보고 있자니 샤워기 물살이 너무 셌나 싶어 콩잎을 다시 살폈다. 검은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한참을 관찰했다. 한 곳만 바라보니 그곳이 내 눈에 확대되어 보였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분명 점이 움직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속으로 설마를 연신 외치며 콩잎을 하나 떼어 눈앞까지 가지고 왔다. 검은 점들이 죽은 듯이 있다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팔에 돋은 소름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올라왔다. 벌레였다. 작은 벌레의 유충인 듯했는데 아직 많이 움직이지 않아 점처럼 보였던 것이다.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화분을 화장실로 다시 옮겼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애써 키웠던 콩을 뽑아서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뿌리가 제법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작년보다 훨씬 크게 자란 콩이었다. 쓰레기봉투 하나에 흙까지 모두 담아 바로 쓰레기장으로 가지고 내려갔다. 습한 날씨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퇴근이 아니라 출근 준비를 마친 후였는데 몸은 퇴근 후 느낌이었다. 두통은 소름이 돋는 순간 날아갔는지 머릿속은 날카로웠다. 집으로 돌아와 온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쓰레기봉투를 꺼내어 조금이라도 찝찝한 것은 모두 버렸다. 공기 중의 습도가 거슬렸다. 더운 여름에 보일러까지 켰다. 청소를 끝내고 나머지 남은 화분 앞에 섰다. 혹시나 싶어 콩잎을 다시 살폈다. 심하지는 않지만 작은 점들이 곳곳에 보였다. 보이는 즉시 이파리를 떼어냈다. 내 눈에 소름과 살기가 동시에 올라왔다. 이 화분도 없애야 하나.
지난 몇 달 동안 보살피던 화분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화분 앞에 서 있을지는 불과 2시간 전까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남은 화분은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 그리고 출근 시간이 다 되어 집을 나섰다. 내 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계속 심호흡을 했다. 작은 점들이 눈앞에 계속 어른거렸고 온몸이 가려운 듯했다. 어디서 벌레가 들어온 것일까. 벌레가 한 화분에 많이 퍼질 때까지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매일을 보고 또 봤던 화분이었는데 나는 도대체 뭘 본 것일까.
학교에 도착할 때쯤이 되어서야 안정이 되었다. 습하고 혼란스러웠던 집은 깨끗이 치워놓았으므로 보일러로 데워지면 습한 공기도 해결이 될 것이다. 크게 한숨을 쉬고 교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웃으며 말하는 내가 가증스러웠다. 자리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니 새벽에 있었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켜고 어제 하다 말았던 파일을 열어 일을 시작했다. 일상은 어제와 같았다.
벌레는 콩응애라고 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벌레들은 내가 아침에 본 점과 같았다. 약을 뿌려 없애지 않으면 번식력이 좋아 사라지지 않을 거라 했다. 해충으로 분류되어 있는 이것은 햇볕을 싫어해서 콩잎 뒤쪽에 붙어 기생하는 특징이 있었다. 콩잎의 양분을 다 빨아먹고 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 살아가는 벌레였다. 하나 남은 화분이 생각났다. 콩응애가 얼마나 더 숨어 있을까. 출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퇴근 시간을 살폈다. 마음이 조급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조바심에는 남아 있는 콩을 향한 살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누구일까.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내가 들어 있을까. 화분 앞에 서서 지난 몇 달간 쏟았던 애정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채 정신없이 콩의 뿌리를 뽑아대던 나는 몇 번째 나일까. 하루하루를 쌓아가며 화분에 정을 줬던 나와는 너무나 다른 내가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신이 몽롱했다. 그래도 또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봤다. 이런 나는 또 누굴까. 나는 도대체 얼마를 더 살아야 나 하나를 알 수 있을까. 이런 내가 남을 교육하기 위한 자리에 앉아 있다. 개뼈따귀 같은 현실 같았다.
두통은 원래 없었다는 듯 머리는 하루 종일 날카로웠다.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가서 화분을 살폈다. 다행히 콩응애가 잘 보이지 않았다. 깨끗하게 치우긴 했지만 곳곳에 남아 있는 아침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다시 한번 청소를 했다. 그리고 화분을 보기 싫은 건지 보기 미안한 건지 화분 옆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비 오는 날 굳이 밖을 걸었다. 내가 느끼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한낮 꿈에 불과한 것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중요한 것이라 여기던 것이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정리가 안 되는 마음 그대로를 안고 글을 쓴다. 그저 살아가는 것일 뿐일까. 나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