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중독 탈출 83일째 : 일본 여행
폰 데이터를 끊은 지 83일째다. 약하게나마 공용 와이파이가 들어오던 현관문 앞은 집안에서 한동안 나의 아지트였다. 문 앞에 설 때마다, 여전히 폰 중독 상태임을 확인하는 좌절감과 익숙하디 익숙한 인터넷을 보는 반가움이 공존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 하나로 양가감정을 모두 다독이곤 했던 곳이었다. 가끔 이웃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와 복도로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때 나는 자다 일어나서 눈곱도 안 뗀 상태였고 늘어질 대로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입을 벌리고 널브러져 인터넷을 보는 중이기도 했다. 발자국 소리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었지만 그뿐이었다. 문을 경계로 안팎이 결정됐다. 나는 안에 있었고 자세를 고치지 않아도 안전했다.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현관문의 존재 의미를 생각했다.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한 달 전, 학생과의 내기에서 져 외워야 했던 히라가나가 거리에 널려 있었다. 시험 공부하듯 외웠다가 곧장 잊어버렸던 터라 글자 모양만 기억이 났다. 그래도 나는 신기했다. 일본 글자는 한문과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섞여 있었는데 가끔 간판 글자를 읽는 데 성공하면 그 앞에서 혼자 얼마나 신나 했는지 모른다. 일본어를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해 보았다. 부담 갖지 말고 히라가나 외우듯이 하나씩만 익혀보자 싶다. 한국어는 내 안에 있고 일본어는 밖에 있다. 그 사이에 한문이 있어 나는 안에서 밖을 보고 밖에서 안을 봤다. 언어처럼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도 잘 섞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지금이라도 불가능하지 않다면 길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어릴 적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뺀또'를 일본 편의점에서 사 먹었다. 맛이 있었다. 학기 중의 공부가 방학 중의 현실로 다가왔다.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인 것이 인생인 듯했다. 끝과 시작의 경계가 무의미하다 싶었다.
일본 여행을 준비하며 컴퓨터를 가지고 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글을 적고 싶다는 이유이긴 했지만 사실 그 밑에는 와이파이가 잘 되는 호텔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내 얄팍한 마음이 들어 있었다. 고백하자면 여행 출발 전까지 고민을 했다. 그러다 요즘 필사하고 있는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보고 마지막 마음을 다잡았다. 얇은 책이 손에 닿자 내 두꺼운 욕심이 부끄러워 손이 오그라들었다. 필사할 공책과 책만 넣고 집을 나섰다. 여행 내내 컴퓨터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에 안심했다. 여행지에서는 낯섦이 안에 있어야 하고 익숙함이 밖에 있어야 한다. 컴퓨터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온전히 낯설 수 있었고 그곳에서 익숙한 듯 낯선 내 민낯을 보며 지냈다. 여행은 거울과 같았다. 거울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와이파이가 너무 잘 되는 숙소도 내가 나를 직면해야 하는 장소였다. 첫째 날 저녁에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 밤에 잠을 설쳐가며 스마트폰을 했다. 80일이 넘게 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는데 하루 만에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허무했지만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는 허무함도 뒷전이었다. 나는 다음 날 피곤했고 예민해져 여행 내내 툴툴거렸다. 피곤함이 누구 탓인지 뻔히 알면서도 덥고 낯선 것을 핑계 삼아 여행에 내 피곤함의 원인을 돌렸다. 전날 밤을 후회하며 둘째 날 저녁에는 스마트폰 대신 책 <무소유>를 잡아 필사를 했다. 법정 스님처럼 좀 더 깨끗한 민낯을 가지고 싶었다. 이것도 욕심이라고 스님은 말씀하실 듯했지만 지금 나는 딱 그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폰이 생각날 때마다 적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명상과 비슷하게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속에 피로함이 쌓이지 않아 다음 날은 피곤하지 않았다. 호텔 사용 후기에 와이파이가 너무 잘 돼서 불편했다고 적는다면 이해를 할까. 나의 솔직한 호텔 사용 후기였다.
일본의 제일 북쪽은 왓카나이인데 오호츠크해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사할린이 육안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이웃하는 두 나라를 한곳에서 보고 싶었다. 모두 이국이지만 한국의 역사를 포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사할린 남부를 점령했고 그때 식민지였던 조선의 백성들이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되었다. 1983년에는 KAL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던 곳이기도 했다. 냉전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내 눈앞 바다는 넓디넓었다. 한국을 벗어난 곳에서 한국을 보고 있었다. 우리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에 읽었던 김훈의 소설 <하얼빈>과 <칼의 노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안에서 느껴지는 억울함이 밖에서도 억울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바다는 현관문과는 달리 두 곳을 모두 보여주었다. 정확한 답을 알 순 없었지만 다행히 2023년 속 나는 양국을 사이에 두고 안전했다.
구름이 많이 껴서 왓카나이에서 사할린을 보지는 못했다. 삿포로에서 차로 5시간 넘게 달려온 곳인데 구름에 가려져 있는 사할린을 보자니 약간의 허무함이 올라왔다. 대신 태평양을 실컷 구경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왓카나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국적이었다. 다시 돌아오면서 소야 언덕의 넓은 평원에서 자유롭게 방목되는 소와 사슴을 보며 그들에게 안과 밖의 개념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에 뜬 구름도 러시아든 일본이든 상관없이 떠다니고 있구나 싶었다. 그것을 나누는 것은 인간들뿐이지 않을까. 현관문, 와이파이 존, 일본어, 한국어도 없는 소야 언덕을 한참 바라보았다. 경이롭다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사할린을 보지 못한 허전함이 구름 속에 섞여 러시아 쪽으로 떠나갔다. 나의 안팎도 조금씩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마지막 날 나는 스마트폰을 거의 보지 않고 잠을 잤다. 여행을 끝내며 방학 때 와이파이가 잘 되는 부모님 댁에서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와이파이 존 안과 밖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지금도 폰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은 경계를 허물면서도 안전할 수 있는 상태가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이 아닌가 싶다. 폰 데이터를 끊고도 그 경계를 의식하며 지냈던 나는 이제부터 진짜로 나를 볼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현관문 앞에서 안과 밖을 보는 내내 기분이 묘했었다. 한 발자국만 지나면 안이고 밖인 것이 마치 어릴 적 땅따먹기를 위해 땅에 선을 긋는 것과 같아 보였다. 현실에서 현관문을 없앨 순 없겠지만 안에서도 밖에서도 편안할 수 있는 건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마음을 조금씩 가질 수 있다면 데이터를 끊으면 어떻고 또다시 살리면 어떠랴. 여행의 여운이 아직 내 몸에 남아 있다. 여행 전보다 내가 좀 더 가벼워졌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