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화둥둥 아몬드 우유
겨우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데스크로 갔다. 환불이나 교환을 위해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던 그날로부터 일주일 하고도 3일 지난 후였다. 지난달 산 믹서기의 잦은 고장으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점원에게 두말 않고 오늘 환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점원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바로 믹서기 값을 환불해 주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그렇게 기다려야 했는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아무튼 1달 하고 10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부실한 믹서기로부터 해방되었다. 대리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믹서기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음식들을 다시 떠올렸다. 5분 전에 정색을 했던 터라 겸연쩍긴 했지만 음식 생각에 금세 설레었다.
요즘 식습관을 고치고 있는 중이라 한창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인터넷에서 먹고 싶은 건강식을 많이 찾았는데 믹서기를 사용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아몬드 우유였다. 이전 믹서기로 아몬드 우유를 만들었다가 믹서기 밑부분이 풀어져 눈앞에서 다 흘러내리는 것을 본 후로는 아몬드 우유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해졌다. 우유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는 상상을 계속했다. 다시 새로 믹서기를 사게 되면 오래된 상상은 곧 현실이 될 것이다. 다음 날부터 밑이 빠지지 않을 믹서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칼날을 깨끗이 씻기 위해 밑부분과 통이 분리되는 믹서기는 모두 넘겼다. 그리고 밑부분이 네모 모양인 것만 찾았다. 내 선택의 기준은 믹서기 통의 밑부분이었다.
며칠 뒤 드디어 누가 봐도 튼튼해 보이는 믹서기를 다시 샀다. 조립한 후 식탁에 두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신남과 의심이 동시에 올라왔다. 이전 믹서기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의심은 기계를 작동해 보면 해결될 일이다. 아침에 아몬드 우유를 만들기 위해 자기 전 생 아몬드를 뜨거운 물에 불렸다. 생 아몬드에는 아미그달린이란 자연산 독이 들어 있는데 이는 익히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껍질에 들어있는 피틴산은 아몬드 안에 들어 있는 미네랄 흡수를 방해하기도 해서 벗겨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아침이 되니 아몬드가 통통해져 있었다. 12시간쯤 불린 아몬드의 껍질을 하나씩 깠다.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껍질 속에 숨어 있던 뽀얀 아몬드 색으로 그릇을 채웠다.
손질이 끝나고 나니 아침 6시 30분이었다. 믹서기 버튼을 누르려는데 소리가 옆집에 들릴지 알 수가 없어 망설여졌다. 보통 출근하기 위해 7시쯤엔 일어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시계만 계속 쳐다봤다. 그리고 7시가 넘었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믹서기 전원을 켰다. 아몬드에 물과 소금을 넣고 신나게 갈았다. 다행히 짧은 시간만에 아몬드 우유가 만들어졌다. 분명 내가 만들었는데 완성된 우유를 보고 있자니 새삼 신기했다. 뽀얀 우유가 벌컥벌컥 들이켜지길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어릴 적 우유병에 든 우유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투명한 컵에 우유를 부었다. 더 맛있어 보였다.
이젠 상상을 현실로 만들 시간이었다. 나는 갓 만든 아몬드 우유를 쭈욱 들이켰다. 고소하고 은은한 아몬드의 향이 느껴졌다. 내가 상상하던 맛보다는 밋밋하다 생각했으나 이는 내가 물 조절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컵에 있던 우유를 다 마시고 나니 몸과 마음이 모두 채워졌다. 이제 계속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음료라 매일 조금씩 만들어 먹기로 했다. 크게 귀찮지도 않고 맛도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출근 전 깨끗이 씻은 믹서기를 햇볕에 말려 두고 나왔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속으로 말했다.
몇 주 전 철학 수업에서 자존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때 나는 자존감이란 잘 먹고 잘 자는 것이라 했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은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우리는 매일 먹어야 하고 자야 한다. 먹고 자는 것은 하찮은 일이라 더 중요한 것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하찮은 것조차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중요한 것을 책임질 수 있겠냐고 반문할 것이다. 내 꿈은 잘 먹고 잘 자는 데서 시작한다. 앞으로 해 먹을 여러 가지 건강식들이 벌써 기대가 되는 이유다. 믹서기가 튼튼해서 다행이다. 나도 덩달아 누가 봐도 튼튼해지면 좋겠다. 이것이 자존감을 지키며 사는 길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