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먼 믹서기

식습관 바꾸기

by 마나

'오늘은 뭘 먹지?'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이다.

학교 급식을 끊은 후 하루 먹거리를 내가 온전히 책임지게 되면서 영양가 있는 식단에 대한 공부가 필요해졌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건강하게 살고도 싶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은 두 가지의 마음을 모두 충족할 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나는 단맛 대신 담백한 맛을 좋아한다. 흔히 말하는 건강한 음식이 내 입맛을 돋우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런 특징을 잘 살려 할 수 있는 채식을 해보기로 했다. 목표는 완벽한 채식이 아니라 맛있으면서도 건강한 식사였다. 칼로리 외에는 영양에 대해 아는 지식이 거의 없는 나의 무지함이 스스로를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자유는 늘 책임을 수반한다. 먹거리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며 내가 이제야 비로소 삶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을 지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심을 챙기는 것은 바쁜 아침에 성가시지 않은 수준에서 해야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찾다가 점심 메뉴는 조승우 한약사가 주장하는 CCA주스 (당근(Carrot), 양배추(Cabbage, 사과(Apple))로 선택했다. 살아 있는 식재료로 만든 식사를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당장 믹서기를 샀다. 주스를 만들어 먹어보니 옛날에 식구들과 함께 만들어 먹었던 해독주스와 비슷한 맛이 났다. 낯선 맛도 아니고 크게 번거롭지도 않아 나름 만족스러웠다.


만든 주스와 고구마로 점심 도시락을 만들었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나는 조금 가벼운 점심이 더 맞았다. 대신 아침과 저녁을 좀 더 챙기기로 했다. 계절 채소와 과일을 주로 이용했다. 장을 볼 때 살 것을 계획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제일 많이 나와 있는 것을 선택해 요리해서 먹는 게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계절에 나오는 식재료를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니 생각보다 메뉴 선택이 쉽고 다채로웠다. 어느 날은 단백질을 충분히 먹기 위해 검은콩 두유를 집에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새로 산 믹서기를 많이 사용하고 싶은 욕심도 한몫을 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콩을 12시간 불린 후 삶고 그것을 믹서기에 넣어 소금을 넣고 갈면 되었다. 꽤 정성을 들여 두유를 만들었다.


맛도 괜찮아서 만족스러웠다. 이제 이것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으면 됐다. 믹서기 손잡이를 돌려 본채 부분과 분리시켰다. 순간, 흥분과 절망감이 동시에 들었다. 갑자기 밑에서 나의 소~오중한 두유가 다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음식물이 들어 있던 믹서기 통 밑부분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순간 황당했다. 다 흘러버린 두유는 어떻게 치우며 믹서기 본체는 어떻게 세척해야 할지 막막했다. 정신없이 걸레질을 해댔다. 닦아도 닦아도 끝없이 갈아진 콩가루가 닦여 나왔다. 며칠 동안 점심시간에 내 몸으로 들어와야 했을 두유는 걸레에게 그대로 흡수되었다. 겨우 바닥을 다 닦고 나니 두유 범벅이 된 믹서기와 두유 냄새를 풍기며 축 늘어진 걸레가 보였다. 다시 청소 2차전이 시작되었다. 걸레로 사용한 세 개의 수건을 두유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믹서기는 휴지로 닦고 설거지를 했다. 본체에 들어간 두유는 닦을 방법이 없어 그냥 두었다. 다행히 기계 작동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믹서기를 사용할 때 너무 흥분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은 좀 더 차분하게 음식을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다. 인터넷에서 본 아몬드 우유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생아몬드에 뜨거운 물을 붓고 12시간 불려 껍질을 깐 후 믹서기에 물과 소금을 넣으면 됐다. 재료를 준비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믹서기 앞에 섰다. 생애 첫 아몬드 우유였다. 곱게 갈린 아몬드는 평소에 먹던 우유와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영양가가 풍부해 보였다. 괜찮다면 매일 한 잔씩 만들어 먹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날의 과오를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정말 조심스럽게 믹서기 손잡이를 잡고 본채와 분리시키기를 시도했다. 아몬드 우유는 내가 천천히 움직이는 만큼 천천히 새어 나왔다. 안 보고 싶어 눈을 감았지만 우유는 끝까지 나왔다. 이번에도 곱디고운 내 아몬드 우유는 또다시 걸레의 차지가 되었다. 바닥 틈 사이가 이틀 동안 검은콩과 아몬드로 촘촘히 채워졌다. 나는 또다시 1시간 청소를 했다. 전날보다는 덜 당황스러운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확히 믹서기가 3번 음식을 토해낸 뒤 그것을 안고 다시 샀던 구입처로 갔다. 사정을 말씀드리자 수리를 해주시겠다고 했다. 7일에서 14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건 내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점심 메뉴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장 내일 먹을 음식부터 생각해 냈다. 다행히 좋아하는 고구마가 제철이라 큰 힘이 되었다. 생으로 먹는 당근도 나름 맛이 있었다. 그리고 점심을 가볍게 먹고자 했던 의도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게 대처법을 찾게 해 주었다. 채식을 시작하고 처음 며칠은 살이 빠지더니 곧 예전으로 회복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 내 길을 찾는구나 싶었다.


이틀 전 믹서기가 다 고쳐졌다는 연락을 받고 데리고 왔다. 그리고 어제 아침 믹서기가 오면 바로 해 먹고 싶었던 아몬드 우유를 다시 만들었다. 맛은 고소했고 이제 다시 분리시킬 일만 남았다. 이제 다시는 걸레에게 우유를 양보하지 않을 거라 믿으며 손잡이를 돌렸다. 믹서기는 내 기대 밑에 숨어 있는 두려움을 캐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뽀얀 아몬드 우유는 다시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 없이 걸레를 들었다. 그리고 1시간 청소를 끝낸 후 믹서기를 들고 다시 구입처로 갔다. 그리고 이것을 더 이상은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아는 점원은 두 말 않고 바로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기 위해 또 1주일의 시간을 이야기했다. 힘없이 알겠다고 말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믹서기를 산 날은 10월 1일이다. 오늘이 10월 29일이니 꼬박 한 달 동안 나는 믹서기를 기다린 것이다. 언제쯤 점심으로 검은콩 두유나 CCA주스 혹은 호박수프를 먹을 수 있을까. 좀 허탈하긴 하지만 다시 돌려 생각해 보니 영 나쁜 일만은 아닌 것도 같다. 믹서기가 없는 덕분에 그 사이에 내 나름의 다른 메뉴를 찾았기 때문이다. 믹서기는 오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 내가 믹서기에게 너무 의존했었던 것도 같다. 나의 의존이 버거워 믹서기가 밑으로 토했으려나. 어떤 연유든 점점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식이 많아지는 것이 든든하다. 다른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라 나에게 의존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싶다. 그래도 하루빨리 믹서기와 친해지고 싶다. 고소한 아몬드 우유 한 잔의 맛이 참으로 궁금하기 때문이다.


대문 믹서기 그림 : 네이버 '펠트보이' 블로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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