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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Feb 03. 2024

우리, 기죽진 맙시다

기 싸움

나는 배구 선수 김연경의 팬이다. 몇 년 전부터 그를 따라 배구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되면 가끔 경기를 직접 보러 다니기도 한다. 며칠 전에도 코트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분명 내 마음은 그에게 있는데 경기가 시작되면 응원은 상대팀에게 하는 편이다. 김연경 선수는 내 응원이 없어도 잘할 것 같아서다. 그리고 승패가 생길 수밖에 없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코트 위 선수들이 기가 죽어 돌아가진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이런 족보 없는 내 마음을 나도 정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어 그냥 둔다. 그날도 흥국생명 응원석에 앉아 작게나마 도로공사를 응원했다. 김연경이 잘하면 당연히 그것 또한 신이 났다. 경기장에서 나는 이래도 저래도 좋은 관중이었다.


스포츠 게임은 선수끼리의 싸움이라 생각했다. 경기장 밖에 서 있는 코치와 감독은 도움을 주는 조력자 역할이므로 관중이 그들 대신 코트 안 선수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 배구 경기를 보고 나오며 나는 선수 대신 감독을 생각했다. 흥국생명 아본단자 감독과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이 한 기 싸움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비디오 판독이었다. 그냥 넘어가기 쉬운 상대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찾아냈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붙은 감독 간의 싸움은 한 치의 양보가 없었고, 덕분에 코트 안팎으로 느껴지는 긴장감은 경기를 보는 나도 긴장하게 했다.


도로공사가 득점을 한 상황이었다. 심판이 점수를 주려 하자, 아본단자 감독이 네트 근처에서 상대가 한 실수를 잡아내어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이는 받아들여졌다. 1점이 도로공사가 아니라 흥국생명에게로 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다음 경기에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흥국생명이 득점을 했는데 김종민 감독이 네트 플레이할 때 상대의 실수가 있었음을 주장하며 비디오 판독을 요청한 것이다. 도로공사를 응원하던 나는 김종민 감독의 판독 요청에 순간 조마조마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도로공사 선수들의 사기가 더 떨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종민 감독의 판단이 옳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경기장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그 뒤에도 코트 위 흐름은 엎치락뒤치락했고 감독들의 기가 코트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실제로는 선수들이 경기를 뛰지만 이를 운영하는 것은 감독이다. 수세에 몰린 감독이 이전 실수나 상대의 선전에 동요되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네트 근처에서 벌어지는 선수들의 움직임은 1, 2초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당사자인 선수조차도 실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김종민 감독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한 것이다. 감독이 판단하기 전 믿은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을까, 배짱이었을까.      


내가 김종민 감독이었다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보통 큰 위험 앞에서 확실하지 않은 결정 대신 회피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회피하기 전 믿지 못한 것은 내 능력이었고 배짱이었다. 그런 시간이 쌓여 능력도 배짱도 없다고 여기며 오랫동안 스스로 미워만 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해 사기가 꺾인 것이다. 김종민 감독의 판독 요청에 내가 불안해했던 것은 나에게 그랬듯 감독도 믿지 못해서였다. 나와는 달리 그는 불안함에 초점을 두지 않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스스로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배짱이라 생각한다. 그와 나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았다. 익숙하진 않지만 r감정 대신 일에 집중하며 상황을 생각하는 방법은 따라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듯했다. 오랫동안 기억할 순간이었다.


경기를 보며 인생이 배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설프긴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의 감독이다. 평소에는 내 안의 다양한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경기가 시작되면 그들을 믿고 배짱을 부려가며 작전을 펼쳐야 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적재적소에 쓰기 위한 배짱도 필요하다. 베짱이처럼 마냥 놀며 산 인생은 아니었다. 살기 위해 애를 쓴 날이 많았으니 그 시간을 믿어보는 건 어떨까. 나는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지만 평생을 스스로 미워해야 할 만큼 망가진 사람도 아니다. 코트 위 모든 선수가 기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마음은 그들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에게도 똑같은 시선을 보내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두 감독의 기 싸움을 관전하며 배구 경기를 보는 시야가 바뀌었다. 감독의 움직임을 따라 선수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본단자 감독은 실제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더 크게 감정을 표현해서 선수들에게 뜻을 전달하고 김종민 감독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뜻을 전달했다. 각자의 방법은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양 팀 선수 모두 사기가 꺾이지 않은 채 최선을 다해 경기를 했고 승패와 상관없이 두 팀 다 멋졌다. 그리고 그들 뒤에 배짱과 능력을 겸비한 감독이 있었다. 왕복 5시간을 운전해 2시간 경기를 보고 온 가성비 떨어지는 하루였지만 그들의 경기를 보며 삶을 느끼는 나 같은 팬도 옆에 있었다. 모두가 고개 들고 집으로 들어갔길 바란다. 멋진 사람들이 많아서 인생은 살 만한 것 같다. 오늘도 한 수 잘 배웠다.


김연경 선수 몸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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