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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Feb 06. 2024

등 떠밀린 기부

오래간만에 조용한 오후였다. 학생은 외부활동으로 모두 나가고 교사는 각자 자리에 앉아 밀린 업무를 하고 있었다. 약간 따분해질 무렵, 교무실 문이 열리며 조심스럽게 서류 가방을 든 한 분이 들어오셨다. 학교에 낯선 이가 들어오는 경우가 잘 없어 모두 누군지 궁금해하며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분도 겸연쩍은 듯 문 근처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잠시 망설이시더니 팸플릿 하나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국경없는의사회'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유튜브를 틀 때마다 보게 되는 광고 덕분에 거의 매일 듣게 되는 단체 이름이었다.  


팸플릿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분도 이런 어색함에 익숙하지 않으신 듯했다. 아무 말이라도 걸어 안심시켜드리고 싶었으나 말을 함과 동시에 그분은 내게 올 것이 뻔했다. 기부에 대한 개념이 없던 나는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듣는 나도 말씀하시는 분도 허공에 대고 각자의 말을 해야 할 그 어색한 순간이 싫어 눈을 돌려 애써 하고 있던 업무에 집중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문 앞으로 모였다. 미안하지만 제발 나에게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분은 어색한 와중에도 용기를 내어 천천히 한 사람씩 말을 걸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교사는 이미 기부를 하고 있거나 사정이 있어 잠시 끊은 상태였다. 마지막이 나였다. 나는 기부를 하는 상황도 아니었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그분과 길 잃은 내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웃음이 내 얼굴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크게 마음먹고, 혹시 일회성 기부가 있으면 하겠다고 했다. 그런 건 있기는 한데 금액이 커서 나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고 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계약서를 작성하다 사기를 당한 적이 있어 모르는 분과 계약은 안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더욱 선한 눈빛을 발사하며 걱정 마라는 뜻으로 한 번 웃고는 정기 기부에 대한 설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셨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유튜브 광고가 생각났다. 어린아이가 눈에 붙은 파리를 뗄 힘이 없어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당시 그 모습을 보고 현재 내 삶과 비교하며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었다. 분명 그때 내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지금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모습 또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때 느낀 미안함 속에는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는 안심이 들어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미안함이 이렇게도 가벼운 것이었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실망감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리고 월급에서 뺄 수 있는 여윳돈을 생각했다. 소액은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등 떠밀려 매달 2만 원씩 기부를 시작했다. 처음 돈이 빠져나갔을 땐, 좀 더 강하게 거부를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돈이 빠져나갈 때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한 돈이 아니라 적절히 거절하지 못해 내는 벌금이라 생각했다. 줏대 없는 기부자의 흔들리는 마음은 몇 달이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벌금'이 빠져나갔다. 메시지에 적힌 액수를 보고 있자니 지난 몇 달간 내 생활이 떠올랐다. 기부하기 전후가 거의 같았다. 비록 마음은 갈팡질팡하였지만, 그분 말씀대로 나는 그동안 크게 부담스럽지 않게 남을 도와준 것이다. 처음으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나는 기부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단지 우연히 기부를 시작하며 이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정도다. 살기 바빠 기부에 대해 관심을 못 가졌다는 핑계를 대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못 했다는 말보다 안 했다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사실, 기부를 시작하고도 내가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니다. 가끔은 자동이체로 빠져나간 돈을 실감도 못 하고 넘기기 때문이다. 지난해를 돌이켜보며 내가 왜 기부를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남을 위한 기부라기보다는 수업 중 내가 학생에게 하는 말이 거짓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지금 나는 나에게 기부하는 거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정기적으로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한 내용을 메일로 받는다.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것일 뿐인데 한 일에 비해 너무 소중한 소식을 들려줘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낀다. 등 떠밀려 억지로 시작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거라 믿는다. 어려울 때 남이 해준 작은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기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의 내 일상이 혼자만의 힘으로 일구어지진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올해는 벌금 대신 기부금을 내고 싶다. 나이 한 살 더 먹었으니 그만큼 받은 도움도 쌓였을 것이다. 이제라도 주는 것이 아니라 잠시 받았던 도움을 되돌려주는 마음으로 살아보자. 새롭게 살 올해의 나를 응원한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보내준 메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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