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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Jan 30. 2024

김밥집 진상 손님

내 사주에는 식신이 하나 있다. 평소에 얌전한 그는 내가 김밥집만 가면 일어나서 설치기 시작한다. 일단 가게에 들어가기 전부터 김밥의 종류가 많은지를 살핀다. 그리고 최고급 김밥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 김밥만을 먹겠다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뻥뻥 쳐댄다. 한 식당에 김밥 종류가 많아봤자 거기서 거기일 텐데 다 먹지도 못하면서 있는 메뉴 중 먹고 싶은 것은 다 사고 싶어 한다. 따뜻한 밥이 얇게 깔리고 속이 많이 든 굵은 김밥이 내가 생각하는 최고급 김밥이다. 소스나 고기가 많이 든 것 말고 다양한 속 재료가 골고루 들어있어야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야 고객 한 명 한 명의 입맛을 고려한 음식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시끌시끌 거리는 동네 분식집에서 최고급 김밥을 주문하는 나의 태도는 함께 온 일행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진상 손님으로 찍히기 쉬운 나는 웬만하면 김밥집은 혼자서 간다. 적어도 함께 밥 먹는 사람에게 피해는 주지 않아야 하니 말이다. 내 소중한 김밥을 나눠 먹지 않아도 된다는 안정감까지 더해지니 내가 김밥집을 누구와 함께 갈 이유는 별로 없는 셈이다. 오래전 처음 계란김밥을 시켰을 때가 기억난다. 김밥이 김이 아니라 계란으로 싸여 있고 아직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밥이었다. 이것이 다 내 것이라니. 나는 김밥을 씹으면서도 없어지는 게 아까워 아껴 먹었다. 김밥에는 진심인 내 안의 식신이 만족할 만한 식사였다. 기분 좋게 김밥값을 내며 가게를 나왔다. 김밥을 먹는 행복 이면에는 이제 내가 시간과 돈을 따지지 않고 먹고 싶은 김밥을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다는 자유가 들어있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김밥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가장 많이 사 먹은 음식이다. 그때는 용돈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고 도서관 근처를 벗어나고 싶은 의지도 없었으므로 인근 김밥집을 점심때마다 찾았다. 1,000원짜리 기본 김밥을 시키면 김밥과 단무지에 따뜻한 국물도 나왔으므로 그 당시 나에게는 고객 만족 식단이었다. 작은 식당이었는데 나는 일부러 점심시간을 좀 지나서 갔다. 최대한 천천히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점심을 10분 만에 다 먹는다는 건 10분 뒤 다시 도서관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창살 없는 감옥에 있던 내게 김밥이 잠깐의 휴식을 매일 제공해 준 셈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 듯 김밥을 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 이때부터 내 안에서 진상 손님의 싹이 트지 않았을까 싶다.


그해 시험에 떨어지고 이듬해에 다시 도서관 생활을 시작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김밥을 시켰는데 기본 김밥이라 아주머니가 미리 만들어 놓으신 김밥을 그대로 썰어 주셨다. 4월이면 제법 봄이 시작된 때였는데도 식은 김밥을 먹으니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속에서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내 서러움의 원인은 식은 김밥 때문이라며 죄 없는 김밥을 젓가락으로 쑤셔댔다. 그리고 시킨 김밥을 안 먹겠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되레 더 열심히 씹어 먹었다. 다음 날에는 따뜻한 김밥을 먹기 위해  잔머리를 써서 오이를 빼고 김밥을 말아 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새로 김밥을 싸서 주셨고 그날은 오이를 먹지 못한 아쉬움 외에는 완벽한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나는 김밥집에 출현했고 똑같이 오이 없는 김밥을 주문했다. 어느 날, 아주머니는 미리 싸놓은 김밥에서 오이를 빼더니 썰어서 내게 주셨다. 식었을 뿐만 아니라 오이 구멍까지 난 김밥을 보니 내 서러움이 다시 올라왔다. 조금 울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김밥을 먹었다. 내가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먹는 거라며 속으로 씩씩거렸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내 침샘은 끝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이런 일이 있고 나면 그 식당을 다시 안 가거나 가더라도 좀 더 고급 김밥을 시키는 장면이 나올 텐데 내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기본 김밥을 먹었고 따뜻한 김밥을 사수하기 위해 오이를 빼달라는 꼼수 따위를 더는 쓰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김밥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날들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때쯤부터 내 안의 식신이 김밥에 달라붙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아침, 길을 지나가는데 김밥집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메뉴를 살피며 침을 삼켰다. 들어가서 먹으려다 그만두었다. 배가 고픈 시간도 아니었지만 김밥집을 볼 때마다 드는 허기는 먹는다고 채워질 것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서 있다가 혼자서 멋쩍게 웃으며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김밥을 먹어야겠다. 나에게 최고급 김밥은 무엇일까. 혹시 남이 만들어 준 김밥은 내 옛날이야기를 소화하기에 부족한 건 아닐까.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 김밥 만드는 법을 검색창에 쳤다. 해 보지 않아서 그렇지 할 수 없는 음식은 아닌 듯했다.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 번 시도해 보자. 초심자의 행운으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 나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상상과 현실은 다를 것이다. 그래도 눈물 젖은 김밥에 도전하는 것만으로 내 안에 진상 손님이 마음을 풀면 좋겠다.


대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블로그 '투혁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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