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나 Jun 29. 2024

눈칫밥이 아니라 눈치 옥수수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옥수수가 나왔다. 껍질 틈새로 살짝 드러난 보라색 옥수수를 보니 금세 침이 고였다. 2주 전 농촌 봉사활동을 갔을 때만 해도 옥수수가 잎은 무성해도 알이 박혀 있진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시장에서 보게 되다니. 농부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옥수수는 정말 빨리 자라는 게 맞는 것 같다. 평소에 내가 자주 채소를 사던 가게 옆집에서 옥수수를 발견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그 가게 주인만 빼고 인근 상인들이 모두 나를 힐끗거렸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모두 예비 손님이니 상인들이 그들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그들 중 한 명이란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다. 주인 없는 가게가 어색해 그냥 갈까 싶었지만 홀연히 떠나기엔 옥수수의 자태가 너무 고왔다. 누가 보면 웃길 정도로 나는 갈까 말까를 반복했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히 주인이 왔다. 옥수수에 관심을 보이자 올해 처음 수확한 거라며 맛있을 거라 말씀하셨다. 나는 몇 시간 뒤에 바로 쪄서 먹을 거라 껍질을 까서 가지고 가기로 했다. 우리는 옥수수가 담긴 바구니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촘촘하게 알이 박힌 보랏빛의 정체가 다 나올 때까지 열심히 껍질을 벗겼다. 나는 옥수수 때문에, 주인은 나 때문에, 흥이 나서 우리는 금세 친목을 다졌다. 주인은 먹어 보고 맛있으면 다시 오라고 하셨다. 나도 묵직한 장바구니가 든든해서 기분 좋게 인사하며 가게를 나왔다. 그때까지도 주변 상인들이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도 귀는 우리 쪽으로 쏠려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다음으로 오이를 사기 위해 옆집에 있는 단골 채소 가게에 바로 들어갔다. 요즘 오이는 한창 제철이라 싱싱하면서도 저렴했다. 낯익은 주인은 나를 슬쩍 쳐다보시곤 내 눈길이 오이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아채시며"2천 원!"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소리가 살짝 날카롭다고 느꼈지만 내가 잘못한 게 없으므로 잘못 느낀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바구니에 누워 있는 5개의 오이 중 2개를 골라 보여드리며 천 원을 내밀었다. 주인은 나를 보지도 않고 돈을 가져가셨다. 순간 당황했지만 바쁘셔서 나를 보지 못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느끼는 약간의 거리감을 애써 무시하며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오려는데 제일 귀퉁이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옥수수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도 옥수수를 팔았었구나.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으나 시장을 나오는 내내 뒤통수가 괜히 찝찝했다. 단골집에서 사야 했는데 옆집에서 그것도 하하 호호하며 옥수수를 샀으니 화가 나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이미 산 옥수수를 다시 돌려주고 원래 가던 가게에서 다시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느낌으로만 판단이 가능한 이 상황에서 내가 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도 오지랖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작 주인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일 수도 있었다. 나도 일부러 주인 약을 올리기 위해 옆집에 가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 게 아니었다. 이 모든 게 내 상상 속 상황일 수 있으니 혼자 괜히 미안해하진 말자고 마음을 먹었다. 


퇴근 후 옥수수를 삶아 앉은자리에서 두 개를 없애버리고 한 시간 뒤에 하나를 더 먹어 치웠다. 내일 언니가 집에 온다고 해서 장만한 옥수수였는데 식욕에 눈이 멀어 언니를 잠시 잊어버렸다. 하나 남은 옥수수가 초라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이성을 찾은 나도 머쓱하게 볼록한 배를 두드리며 단골집 옥수수를 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잠시 쉬는 시간에 장바구니를 들고 바로 채소 가게로 갔다. 나는 당당하게 옥수수를 달라고 말하며 쪼그리고 앉아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늘은 주인 기분도 괜찮은 듯했다. 옆집 옥수수와는 달리 여기는 상아색 옥수수였다. 내 침은 옥수수 앞에서는 자동 반사였다. 고인 침을 애써 삼켰다. 


주인은 나이에 맞지 않게 해맑은 내가 어이없었는지 잠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옥수수 하나를 더 꺼내주셨다. 덤으로 주시는 옥수수가 더 통통해 보여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혹시 어제 일로 미안하셨던 걸까. 어제 내가 느낀 것이 마냥 내 상상 속 일만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장에는 왜 같은 종류의 가게가 나란히 붙어 있는 걸까. 나는 그저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꼭 사야 할 물건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런데 돌아다니다 보면 사고 싶은 게 생긴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장을 도는 것뿐인데 상인들은 내 가벼운 몸짓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듯했다. 옆집과 경쟁하며 손님을 잡아야 하니 그들의 신경은 늘 곤두서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 월급의 8할도 눈치 값이다. 가끔은 눈치가 범벅이 되어 뻑뻑한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 비율과 상황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나만 돈 버는 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빠른 눈빛과 눈치가 마음이 쓰였다. 잠시나마 시장을 돌며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은데 그곳 또한 누군가의 일터였다. 시장은 나만의 놀이터가 될 순 없는 건가. 상인들이 이해가 되면 될수록 가벼워지고 싶은 내 마음이 무거워져 안타깝다. 이제는 물건을 사야 할 때만 가야겠다. 그나저나 다음 번에 채소는 어느 가게에서 사야 할까. 


대문사진 출처 : 픽사베이



이전 02화 자존감 충전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