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나 Jun 26. 2024

자존감 충전소

눈을 뜨니 새벽 4시였다. 아직 깜깜했지만 경험상 이제 더는 잠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밤 9시도 안 되어 잠이 들었으니 7시간 푹 잔 것도 맞았다. 시간대가 남들과 달라 새벽에 하루를 시작하지만 나는 다 자고 일어났고 내 기준으로는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거였다. 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지만 그런다고 다시 잘 눈도 아니었다. 조용한 새벽에 기계처럼 책과 공책을 펴서 필사를 시작했다. 손으로 읽는 독서는 느릴 수밖에 없어 서서히 잠 깨기 좋은 활동이었다. 천천히 채워지는 필사 공책을 보고 있으니 바쁜 낮 생활과 대비되며 꿈속같이 느껴졌다. 시간으로 약간의 사치를 부리는 순간이 나쁘지 않았다.  


공책 한 바닥을 채우는 데는 보통 30분에서 40분 정도가 걸린다. 필사를 끝내고 오늘 쓴 부분을 소리 내어 다시 읽었다. 소가 되새김질 하듯 책을 곱씹는 단계였다. 쓰는 데 집중하다 놓친 부분을 주워 담기도 좋았다. 요즘은 친구가 쓴 책을 필사 중인데 오늘은 다소 힘든 날이었다고 했다. 고민거리가 많았던 날, 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으며 힘을 내는 모습이 보였다. 친구 표현으로는 그 편지가 그때 자신에게 딱 필요한 처방전이었다고 했다. 나와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친구라 그의 고됨이 좀 더 와닿았다. 학생의 편지가 처방전이라는 말도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수고 많았다고 했다. 혼자 책을 읽는 거지만 책이 다 끝날 때까지 나는 이렇게 친구와 대화하듯 필사를 하지 싶다.


필사가 끝나고 요가를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이때가 고비였다. 정신은 들었지만 아직 움직이는 것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요가 매트를 보며 망설였다. 여기서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핵심이었다. 머리로 생각하려는 순간을 손이 낚아챈 후 바로 요가 매트를 폈다. 가끔은 매트 깔기 전에 요가 영상을 먼저 틀기도 한다. 일단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면 게임 끝이었다. 그때부터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30분 동안 선생님을 따라 혼자 끙끙거리기만 하면 됐다. 말 그대로 달밤에 체조였지만 나름 땀도 나고 힘도 들었다. 누가 요가를 정적인 운동이라고 했을까. 나는 하루 중 가장 격렬한 순간을 보낸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샤워를 했다. 


필사와 요가를 하고 나면 하루 숙제를 다 끝낸 기분이다. 오늘 아침도 잘 시작하는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했다. 오전 6시 50분, 알람이 울렸다. 출근 시간에 맞춰 놓은 알람인데 나는 다시 휴식을 취하기 위한 소리로 사용했다. 출근 준비가 거의 다 된 채로 다시 이부자리에 들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1시간 40분이 남아 있었다. 한숨 더 잘까 하다가 잠이 오지 않아 얼마간 뒤척이다 일어났다. 아침에 기운이 제일 좋아서인지 나는 보통 세끼 중 아침 식사를 가장 많이 한다. 오늘도 저녁 같은 아침을 먹었다. 잘 자고 잘 먹었으니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잘 살기만 하면 되겠네. 다행히 근무 시간은 남들의 일상과 겹쳤다. 오늘 학교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분리배출할 것들을 들고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버릴 쓰레기 없는 깨끗한 집을 보니 내 속도 가벼워진 듯했다. 눈을 뜬 지 벌써 4시간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지금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이지만 내 몸은 정오였다. 나에게 출근은 시작이 아니라 하루가 한참 진행 중인 시간이 맞았다. 살짝 피곤하고 살짝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숙제 다 했으니 나머지는 닥치는 대로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출근을 했다. 잘 정돈된 아침의 힘은 내 자존감 충전소였다.


요즘 학교는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대부분이다. 가끔은 애쓰는 내 모습이 가상해서라도 예상 범위 내에 있는 일이 생기면 좋으련만 올해는 그런 운은 도통 없나 보다.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넋 놓고 있기도 한다. 그럴 때 가끔 내가 보냈던 아침 시간을 떠올린다. 내가 정한 일상을 흩트리지 않고 잘 유지하며 산다는 자부심. 그것이 생각지 못한 순간에 스스로를 믿게 한다. 작은 일들을 했을 뿐인데 그 시간이 모여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고맙다. 힘든 일이 많지만 올해만큼 도전하며 일한 적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매일 아침 한 바닥씩 쌓이는 필사 공책과 조금씩 더 눌러지는 내 허리를 보며 확인한다. 오늘처럼 내일도 내가 나를 증명하며 살 수 있길 바란다.


대문사진 출처 : 픽사베이

이전 01화 하고 싶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