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달살이 : 고사리 채취
"혹시 고사리에 관심 있으세요? 요즘 제주도는 고사리 철이거든요. 같이 따러 가실래요?"
제주도로 출발하기 전 확인 차 숙소 주인이 연락이 왔어. 그리고 고사리 이야기를 했지. 비빔밥 먹을 때 외엔 거의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지만 이야기를 듣자마자 엄마가 좋아하는 고사리를 직접 따 드리겠다는 야망이 생기더라고. 어린 고사리는 웅크린 아기 손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어서 실제로 그런지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야. 지난달 절에 있을 때 냉이를 캔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눈에 익고 나니 잘 찾아지더라고. 그때처럼 비록 지금은 고사리를 잘 모르지만 계속 보다 보면 한 끼 식사할 정도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평소에도 산 타는 걸 좋아하니까 분명 나도 예전에 냉이든, 고사리든 보긴 봤을 거야. 까막눈이라 봐도 뭐가 뭔지 모르고 넘어간 게 문제였겠지만. 이번 기회에 고사리를 제대로 알아서 다음에 산에서 고사리를 보면 알은체를 단단히 하겠다고 생각했어.
제주도에서 지낸 지 일주일 정도 지난 후 숙소 주인과 함께 인근 오름에 갔어. 거기엔 관리를 안 하는 듯한 풀밭이 있었는데 말먹이로 쓰일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라 하더라고. 이른 아침에도 우리 외에 고사리를 따러 온 사람들이 있었어. 다들 큰 가방 하나씩 메고 밭 사이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지. 우리도 그들 속으로 들어갔어. 고사리는 어려서 잎이 피지 않았을 때만 채취해서 먹을 수 있다고 했어. 독성이 있어서 생으로 먹으면 안 되고 말이야. 숙소 주인이 먼저 고사리 순을 찾아 따는 시범을 보여줬어. 그리고 내가 찾아서 하나를 채취하는 것까지 보고 헤어졌지. 그때부터 나도 열심히 어슬렁거렸어. 고사리는 군집을 이루어 산다고 했기 때문에 잎이 핀 어른 고사리를 찾아 그 인근을 들춰냈지.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고 가방도 제법 채워져서 꽤 재미가 있었어.
고사리만 쫓아 두어 시간을 밭에서 보냈어. 아무 생각 없이 땅만 보다 보니 고개를 들었을 땐 내가 처음 출발했던 곳에서 얼마나 떨어진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 길치는 밭에서도 길을 잃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났어. 그나마 주변에 고사리를 캐러 온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나는 같은 무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과 많이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했어. 그러다 문득,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혼자가 된 사자가 다른 무리에 끼지는 못하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장면이 떠오르더라고. 야생에서 무리를 지으려는 건 동물의 생존본능이구나 싶었지. 다행히 그분들도 나의 존재를 크게 거슬려하는 것 같진 않았어.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될 때쯤, 사라졌던 주인이 다시 돌아왔어. 그제야 내 무리를 찾은 듯한 안도감이 들더라. 나도 고사리처럼 군집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어.
주인과 나는 각자 어깨에 한 짐씩 메고 차 쪽으로 돌아왔어. 그 후 싱글벙글했던 우리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지기까진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 차를 진흙밭에 주차한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출발하려고 보니 바퀴가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헛돌기만 하는 거야. 근처에 있는 돌을 바퀴 주변에 깔아보고 흙도 파서 없애봤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어. 결국 보험 회사 현장 구조원이 와서 차를 빼주실 때까지 발을 동동 굴러야 했지. 집으로 돌아가며 주인에게 잊지 못할 하루였다고 했어. 주인도 웃으며 내 말에 동의한다더라.
자연은 포근하지만 한시도 마음을 놓아선 안 되는 곳인 듯해. 당장 1분 후에 내가 어떤 상황에 마주칠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그래도 웃을 수 있었던 건 채취할 고사리가 있고 함께 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사람에 지쳐 혼자 있을 곳을 찾아 제주도로 온 나에게 무리로 돌아가야 살 수 있다고 고사리가 말하는 듯했어. 그게 답인가 싶으면서도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 피곤해지더라. 지금 나는 딱 이 수준이구나 싶었지. 더는 깊게 생각 안 하려고 해. 피로를 쌓는데 시간이 걸리듯 푸는 데도 그럴 테니까 말이야.
집에 와서 뜨거운 물에 고사리를 넣고 10분을 삶았어. 그래야 독성이 빠진다 하더라고. 자세히 살펴보니 고사리는 정말로 아기가 손을 움켜쥔 모습과 닮아 있었어. 순간, 잎을 채 피우지도 못한 것을 꺾었다는 생각에 조금 미안했어. 곧 맛있게 먹을 거면서도 나는 늘 이렇게 양가감정을 느끼며 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아기 손을 닮은 것만 찾아 꺾은 오늘이 만족스러워서, 미안했어.
삶은 고사리는 바람 잘 부는 곳에서 3일 정도를 말리면 거무스름한 마른 나뭇가지처럼 돼. 주인이 딴 양에 비하면 3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내가 딴 고사리도 충분해 보였어. 그리고 얼마나 잘 마르는지 궁금한 마음에 한 시간에 한 번씩 베란다에 나갔지. 성격 급한 나와는 상관없이 고사리는 제 속도에 맞춰 조금씩 말라가고 색도 진해졌어. 한달살이를 마치고 부모님 댁으로 쉬러 갈 때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가려고. 왕관처럼 머리에 이고 자랑하듯 들어갈 수도 있고. 제주도에 와서 제주도 땅을 제대로 밟은 하루였어. 그 속에서 자란 나물도 채취했으니 이제 나도 이 땅을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 5일장이 열리면 시장 상인들이 파는 고사리를 살펴봐야겠어. 내 것과 비슷한지 보고 또 보려고. 그나저나 아까워서 먹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3월 말에서 5월 초까지 제주도는 고사리 철이야. 그날 이후로 오름, 곶자왈 가릴 것 없이 길을 지날 때마다 잎이 핀 어른 고사리가 보였어. 우연히 아는 사람 만난 마냥 반가우면서도 조금만 일찍 왔으면 캘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잔인한 생각도 들었지. 길에서 뿐만 아니라 반찬으로 나온 고사리도 신나게 씹었어. 제철이라 꼭 비빔밥 안이 아니더라도 자주 보이더라고. 이렇게 안면을 텄으니 앞으로 봄이 되면 고사리와 냉이는 많이 먹게 될 것 같아. 할 수 있다면 다시 캐고도 싶고. 뭐니 뭐니 해도 직접 캐서 먹는 봄나물이 제일 영양분이 많을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