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뚜벅이와 길동무

제주도 한달살이 : 산방산

by 마나

아침에 눈을 뜨고 낯선 천장을 멀뚱하게 쳐다봤어. 한달살이를 어떻게 시작하면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하며 이불속에서 몸을 뒤척거렸지. 그러다 제주도에 가면 산방산 온천을 꼭 가 보라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어. 탄산수라 물에 들어가면 탄산이 몸에 붙어 신기할 거라 하더라고. 지도로 위치를 찾아보니 숙소에서 걸으면 한 시간 반 걸리는 거리였어. 제주도에서 많이 걸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온 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그날은 어디든 걸어갈 열정이 가득 차 있었지. 목적지가 결정 났으니 더는 이불속에 있을 필요가 없었어. 나는 세신 수건만 챙겨서 바로 밖으로 나왔어. 목욕도 목욕이지만 왕복 3시간을 걸으며 볼 제주도 풍경이 더 기대가 됐던 것 같아.

산방산.jpg 서귀포 시골길을 걸을 때마다 보이던 산방산

숙소를 나와 걸은 지 채 20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멀리서 홀로 봉긋 솟은 산방산이 보였어. 도착하기까지 아직 1시간 10분을 더 걸어야 하는 거리였지만 산은 벌써 눈에 띄더라고. 책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산을 보자마자 왕자의 보아뱀 그림을 떠올렸을 거야. 나도 저 안에 진짜 코끼리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싱거운 상상을 하며 걸었지. 산방산을 보며 산방산을 향해 걸으니 나 잡아봐라고 놀리는 듯했어. 혼자 걷기 적적했는데 독특한 산의 모양 덕분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하는 게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아. 여자는 바람 부는 제주도 길을 앞에 있는 돌산만 보며 열심히 걸었어. 산방산도 분명 바람 부는 길을 걷는 내 모습을 보며 삼다도(제주도 별칭:여자, 돌, 바람 세 가지가 많은 섬이라는 뜻)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거야.


도착하기까지 꼬박 1시간 반이 걸렸어. 그런데 불행히도 온천은 재정비 중이었지. 욱신거리는 다리를 따뜻한 물에 담글 수 없다는 사실에 주춤했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어쩔 수 없는 거에 마음 써봤자 헛수고일 테니 그냥 나올 수밖에. 대신, 다리를 달래기 위해 근처 버스정류장을 찾았어. 급할 것 없는 한량은 제법 걸었다는 핑계를 대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쉬었지. 그날 나는 목욕하러 나갔다가 목욕만 빼고 다 하고 돌아왔어.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지만 무사히 걷다 돌아왔으니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해. 욱신거리는 다리가 내가 낯선 제주도에서 산방산에 의지하며 신나게 하루를 걸었단 증거니까.


다음 날은 용머리 해안을 가기로 했어. 이곳도 전날만큼 걸어야 할 듯했지. 숙소에서 사계 해수욕장을 지나 용머리 해안까지 바다를 보며 걸었어. 눈에 다 담을 수 없는 자연을 볼 때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나를 발견하곤 했어. 내 안에 담고 싶은 욕심 때문이겠지. 그때도 마찬가지였어. 사진을 찍어봤지만 느낌을 담을 순 없더라고. 그래서 대신 용머리 해안에 도착하면 벤치에 앉아 바다 구경이나 실컷 하기로 마음먹었지. 그런데 해안에 다 다르자마자 내 계획은 바로 바뀌었어. 산방산이 바로 옆에 있는 게 보였거든. 어제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어서 절벽이 바로 내 앞에 쏟아질 것만 같았어. 덩치 큰 친구가 반가워 나는 해안 구경할 생각은 안 하고 주변만 얼씬거렸어. 산방산 귀퉁이에 앉아 주전부리도 먹고 말이야.


그때쯤부터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 보이는 산방산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던 것 같아. 다양한 방향에서 그를 보고 싶었지. 지도에서 보니 산방산 근처에 송악산도 있더라고. 며칠 동안은 우연히 만났지만 그날은 산방산을 볼 작정을 하고 일부러 송악산에 갔어. 산은 바다 옆에서 귀엽게 솟아 있더라. 넓은 곳에서 본 산방산은 아담했어. 전날에는 분명 절벽 때문에 크고 거칠어 보였는데 말이야. 까까머리 같은 작은 산을 보며 산방산이 한라산 뚜껑이었다는 전설을 살짝 믿어보기로 했지. 계속 보면 정든다는 말처럼 서귀포를 걸으면 걸을수록 산방산이 더 보였어. 거의 매일 본 것 같은데 지겹지 않고 볼수록 정이 갔어. 말 그대로 보고 또 봐도 반가운 당신이었지.

산방산 (2).jpg 가파도에서 본 산방산, 송악산, 한라산, 형제섬

첫 주 마지막 날에 간 곳은 가파도였어. 넓적한 가오리(가파리)를 닮은 섬이었지. 그곳에는 일주일 동안 발품 팔아 하나씩 구경했던 산과 오름 그리고 섬들이 한 곳에 다 모여 있었어. 직접 걸어서 가 본 곳들이 아니었다면 가파도에서 본 그들이 그렇게까지 반갑진 않았을 거야. 또, 송악산과 산방산 사이에 용머리 해안이 숨어 있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을 거고. 단지 산방산이 좋아 걸었을 뿐인데 걷다 보니 이 지역에 정이 들었단 걸 느낄 수 있겠더라. 가파도 벤치에 앉아 바다 바람을 맞으며 청보리가 넘실거리는 걸 구경했어.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내가 걸었던 길을 하나씩 복기했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명화를 감상하는 느낌이었어.


매일 2만 보 정도를 걸었어. 쉽진 않았지만 제주도 남쪽을 정성스럽게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생각해. 나는 이런 게 나다운 것 같아. 하나씩 시간과 발품을 팔아 뭔가를 알아가는 것 말이야. 꽃잎 하나에도 온 우주가 들어있다잖아. 작은 마을 하나만 잘 돌아다녀도 제주도 전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어. 남들이 차 타고 쉽게 도달하는 곳에 걸어서 늦게 도착한다 하더라도 뭐 어때. 대신 더 자세히 길을 볼 수 있으니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을 거잖아. 내가 사는 세상만이라도 느릴 수 있으면 좋겠어. 산방산 하나를 보는 데도 일주일이 더 걸렸지만 내겐 아직도 더 보고 싶은 그대니까 말이야.


산에 방이 있어 산방산이라 했어. 방 이름이 산방굴사라고 하던데 어떤 곳인지 궁금해 조만간 가 보려고. 그곳에서 본 바깥 풍경도 구경하고 말이야. 그는 참 좋은 길동무야. 제주도 어느 곳을 걸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할 때 내게 기준이 되어 주었으니까. 그를 기점으로 여러 곳을 다녔고 다양한 세상을 보고 배웠어. 특히, 하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까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지. 만난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라 내가 산방산을 다 안다고 생각하진 않아. 다행히 제주도에서 지낼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랄 뿐이야. 내 안에도 산방산처럼 다양한 모습이 들어 있겠지. 제주도를 걸으며 산과 친해지듯 나랑도 친해지는 중인 듯해. 어제의 내가 오늘의 기준점이 되고 또 내일로 이어지면서 말이야. 내가 나에게 보고 또 봐도 반가운 그대가 될 때까지 천천히 걸으며 정을 줘보자고.

산방산6.jpg 송악산에서 본 산방산, 한라산, 형제섬
산방산2.jpg 용머리 해안에서 본 산방산(제일 가깝게 볼 수 있어요)
산방산3.jpg 산방산 측면
산방산5.jpg 산방산 일출


가파도에서 본 제주도


keyword
마나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