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꺼졌수다

제주도 한달살이 : 동네 백수

by 마나

제주도에는 못난이 귤이 많아. 맛은 똑같은데 껍질 색이 고르게 예쁘지 않아 가게 구석으로 밀려난 것들이야. 썩은 듯 보이는 껍질을 벗기면 세상 달달한 과즙이 나와. 숨어 있는 달콤함을 찾아낸 자만이 맛을 볼 수 있지. 제주도 한달살이가 만족스러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못난이 귤이야. 돈 없는 나 같은 동네 백수도 제법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하거든. 인근에 5일장이 서면 만원이면 서른 개 정도를 살 수가 있어. 며칠 전에는 마음씨 좋은 주인이 서비스로 제법 예쁜 귤도 몇 개 넣어주셔서 기분이 최고였어. 숙소까지 들고 오느라 등에 힘을 줘야 했지만 한동안 달달할 수 있다는데 이 정도 무게는 감수해야지 않겠어. 나는 시장에서 산 옥수수 하나를 입에 물고 세월아 네월아를 외치며 숙소로 돌아왔어. 그때 난 누가 봐도 이 동네 사람이었지.


제주도 한달살이 2주째야. 패기 넘치게 걷고 또 걷던 첫 주때와는 달리 나는 지금 폭삭 꺼졌어. 신나게 돌아다닌 탓에 내 과한 흥을 이기지 못한 다리가 반항을 하기 시작한 거지. 삐걱거리는 무릎을 보며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더라. 평소보다 갑자기 많이 걸었으니 성이 날 만도 하다 싶었지. 반성하는 의미로 며칠을 거의 숙소에서만 보냈어. 움직이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강제로 가만히 있으려니 자동적으로 의기소침해지더라고. 실컷 걸으려고 온 제주도에서 남은 기간 내내 요양만 하고 가는 거 아닌가 싶어 허무하기도 하고 말이야.


조금 나아졌다 싶어 다시 돌아다니려고 준비해서 나오면 몇 걸음 못 가 무릎이 째려보듯 신호를 보냈어. 지은 죄가 있어서 나는 찍 소리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지. 버스를 타고 다녀도 봤지만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은 전혀 즐겁지 않았어. 점점 마음까지 푹 꺼지는 것 같더라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땐 걷지 못한다는 사실에만 꽂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땅으로만 파고들었어.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동네만 어슬렁거렸지. 그나마 5일에 한 번 서는 장이 있어 다행이었어.


그날도 나는 동네 한의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었어. 우울한 내 기분과는 달리 옆에서 할머니 한 분이 쨍쨍한 목소리로 제주도 방언을 쓰시며 통화를 하시더라고. 무슨 말씀을 하시길래 저렇게 신이 나셨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똑같은 한국인데 이럴 순 없는 거잖아. 당황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학생 때 영어 듣기 평가 만점 받던 경험을 살려 할머니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초집중을 했지. 그리고 다시 실패했어. 잠시 멍해지더니 갑자기 웃음이 나더라. 누워서 해석하려고 옆으로 목을 빼던 내 모습이 웃기더라고. 그제야 내가 지금 제주도에 있긴 있나 보다 싶었지. 그러면서 서서히 내 안에 흥이 다시 올라왔던 것 같아. 진짜 제주도 살이는 이런 게 아닐까 싶었거든.


의사 선생님이 내 다리를 보며 그러시더라. 통증은 몸이 주는 신호라고 말이야. 그때까지도 걷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않았던 나는 속마음을 들킨 듯 멋쩍게 웃었어.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신호를 제대로 바라보기로 마음먹었지. 병원을 나오는 내 발걸음이 더는 무겁지 않았어. 용한 의사 선생님과 제주도 할머니가 내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신 덕분이라 생각해. 다리가 아픈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어. 이제 앞으로는 통증 없이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진정한 동네 주민이 된 듯해 기분도 좋고 말이야. 내가 겪는 모든 일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성급하게 좋은 일, 나쁜 일 구분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어.


숙소로 가기 전 인근에 있는 작은 절에 갔어. 부처님께 다리 낫게 해 달라고 엄살도 좀 부리고 지난달 절에서 한 한달살이 추억도 다시 소환하려는 목적이었지. 절은 조금 큰 가정집 정도로 아담했는데 부처님 오신 날이라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아. 시끌시끌한 분위기와 스님 염불 하시는 소리가 담 밖에서도 들렸어. 반가운 마음에 친구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서둘러 들어갔지.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드리고 점심 공양을 받아 한쪽에 자리를 잡았어. 그리고 비빔밥에 디저트로 나온 절편까지 천천히 씹어먹으며 절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지. 서로 아는 척하시는 걸 보니 동네 사람들인 것 같았어. 나도 한동네에 사니 함께 있어도 된다고 속으로 능청을 떨며 한참을 그들 속에 있었던 것 같아. 부처님 빼곤 아는 이가 한 명도 없었지만 나는 그저 편안했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늘에 구름이 꽉 차 있더라. 오후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는 동네 사람인 나는 발걸음부터 여유가 있었지. 우리 집은 일몰을 잘 볼 수가 있어 저녁이 되면 베란다로 나가곤 했는데 그날은 못 볼 듯했어. 그래도 아쉽지 않았어. 일몰을 볼 수 있는 날도, 볼 수 없는 날도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을 테니까. 나는 해가 지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고 가방 속엔 우산이 있었어. 조금씩 덜 낯선 곳이 되어 가는 제주도 서귀포를 느끼며 내 안의 여유를 찾는 것 같아. 셋째 주 제주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올까. 좀 더 걸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이젠 뭐든 괜찮을 것 같아. 나는 제주도 동네 백수이고 식량으로 먹을 못난이 귤도 잔뜩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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