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보만 걷기

제주도 한달살이 : 재활

by 마나

"이제 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물리치료를 끝낸 후 무릎에 테이핑을 해 주시며 물으셨어. 나는 한결 나아졌다며 웃으며 대답했지. 무리해서 걷다가 탈이 났던 다리가 다행히 나아가고 있었어. 제주도 걷기 여행을 와서 걷기는커녕 기지도 못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혼자서 벌인 사투도 이제 거의 끝나간다는 뜻이었어.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는 게 틀림없어. 다리의 움직임이 가벼워지는 만큼 마음의 무게도 줄어들었으니까. 쉬는 동안 나는 제주도 남쪽 작은 시골을 어슬렁거렸어. 덕분에 지도를 보고도 열심히 두리번거려야 찾을 수 있던 시장은 이제 내 손바닥 안에 있었고 단골집도 생겨 여러 가지 먹거리들도 제법 괜찮은 거래를 하며 살 수 있게 됐지.


한달살이 첫 주는 마음대로 걸었고 둘째 주는 몸대로 쉬었으니 셋째 주는 몸과 마음이 타협을 해서 걸어보기로 했어. 죄지은 사람이 눈치 보는 법이잖아. 나는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은 약한 다리의 상태를 수시로 살폈어. 그리고 천천히 걸어보되 무릎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숙소로 돌아오기로 작전을 짰지. 올레길을 걷기 전 시범 삼아 인근에 있는 곶자왈도립공원을 가려고 밖을 나왔어. 곶자왈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정한 원시림인데 오랜 시간 방치된 덕분에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라 했지. 도립공원의 길은 걷기 힘들지 않고 완만하다는 설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신이 나서 버스 밖을 목이 빠지라 쳐다봤어.

곶자왈도립공원

공원 초입부터 빽빽한 나무 사이로 폭신폭신한 길이 쭉 뻗어 있었어. 덕분에 무릎에 무리도 가지 않고 틈틈이 들어온 햇빛을 보는 맛도 있었지. 나는 걷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천천히 걸었어. 곶자왈 안에는 간혹 가다 빠르게 걷거나 뛰는 사람도 보이더라고. 2주 전에는 나도 저랬었는데 싶었지만 그렇다고 부럽진 않았어.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은 다시 걸을 수 있는 것 이상을 원하면 안 될 것 같았거든. 아픈 다리와 밀당을 하며 걸으려면 다른 생각은 말고 다리에 집중해야 했어.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조심했지. 공원에는 중앙에 길이 나 있어 어디서든 곧장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어. 쉬엄쉬엄 2시간 정도를 걸었어. 6천 보 정도가 나왔지. 다행히 무릎은 괜찮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돌아왔어.


다음 날부터는 올레길을 걸으며 조금씩 거리를 늘렸어. 전날보다 5분만 더 움직이자 싶었지. 남들은 하루 걸을 길을 4일 분량으로 쪼개야 했지만 지난주 숙소에서만 있었던 시간에 비하니 마냥 좋기만 하더라고. 정한 시간이 지나면 일단 걷기를 멈추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어. 다리도 쉬고 배도 채울 겸해서 말이야. 유명한 곳이 아니라 그냥 동네 식당인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그게 더 좋았던 것 같아. 동네 인심은 관광지에 비할 바가 못됐으니까. 계획한 대로 잘 걸었단 사실에 스스로 대견해하며 밥알을 신나게 씹었어. 영양분이 몽땅 무릎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내 모든 신경이 다리에 가 있는 것 같았어. 그다음은 말 그대로 보너스 시간이었어. 다리 상태에 맞춰 길을 정했는데 힘이 있으면 걷고 모자라면 버스를 탔지. 아프고 난 후라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 다시 걸을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했어.

올레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이 함께한다는 게 뭔지 알게 된 것 같아. 그건 체력은 생각하지 않고 제주도 모든 길을 내 발로 걸어보겠다는 허황된 야망을 버리는 걸 뜻했어.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지 몸과 다리의 상태를 살피며 도전하는 것을 뜻했고. 걷기 좋아하는 나에게 올레길은 매력적인 곳이 틀림없었지만 남들도 하니 나도 할 수 있다는 무모한 생각은 접어야 하는 나이임을 인정해야 할 때였지. 다행히 멈췄다 다시 걷는 길은 더는 정복할 이유가 없어 보였어. 도전 대신 즐기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꿨으니까. 그리고 옛날 양반이 걷듯 허리에 뒷짐을 지고 만보로 걸었어. 실제 걷는 속도와는 달리 내 기분은 하늘을 나는 듯했지.


길도 내 발걸음에 맞춰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어. 천천히 걸으니 구경할 것들이 많이 보이더라고. 비가 오는 날에는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달팽이들이 길 중앙에서 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어. 하마터면 밟을 뻔했는데 나도 그들 속도만큼 움직이고 있어서 멈출 수 있었지. 너도 올레길을 걷고 싶구나. 내 마음이 네 마음이었지만 나는 되고 너는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작은 몸을 살짝 들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줬지. 그다음 날에는 작은 뱀이 나왔어. 놀라서 계속 쳐다봤는데 혀를 날름거리는 게 썩 예뻐 보이진 않았던 것 같아. 작아서 그대로 있었지 컸으면 놀라서 아픈 다리가 갑자기 나은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을 거야. 또, 올레길에는 늘 새소리도 들렸어. 하루는 작은 새가 날지 않고 내 앞을 총총거리며 앞서 가더라고. 순간, 내 발소리에 그와의 동행이 날아가는 게 싫어 더 살살 걸었지. 나는 그렇게 자연 속에 있었어. 걷기에만 집중했던 예전이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었어.


지금 내 다리는 만보기야. 1만 보 정도 걸으면 정확하게 신호를 보내거든. 아직까진 최신형인가 봐. 이제 점점 제주도에서 지낼 시간도 지냈던 시간보다 짧아져. 남은 시간도 여태 한 것처럼 걸을 만큼만 걷다가 돌아가려고. 한 번 정해진 관계는 잘 변하지 않잖아. 다리와 나의 관계도 이렇게 굳어지지 않을까 싶어. 걷고 싶은 욕심에 눈이 멀면 멀수록 다리는 더 예민해질 테니 눈치껏 살아야지 어쩌겠어. 올레길 위에서 욕심 버리는 연습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앞으로도 잘 걷고 싶어.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 잡힌 상태로 말이야. 그러니 많이 걸을 생각 말고 잘 걸어 보자고.

올레길 위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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