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달살이 : 마지막 이틀
섬으로 들어가는 배 안에 손님은 나 혼자였어. 차귀도는 무인도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던 거였는데 배 안까지 사람이 없을 준 몰랐지. 선장님과 나는 텅 빈 공간에서 서로를 어색하게 의식하며 바다를 가로질러 섬으로 들어갔어. 배는 나를 내리고 섬 구경을 끝낸 한 사람을 다시 태웠지. 선장님은 한 시간 후에 오겠다고 하셨어. 그때까지도 나는 배가 선착장과 멀어지는 것을 그저 무심하게 쳐다만 봤던 것 같아. 그러다 문득 무인도에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어. "섬에 저뿐인가요?" 멀어져 가는 선장님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하는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알 도리가 없었어.
배는 떠나고 나는 남았어. 드넓은 벌판에는 바닷바람이 신나게 불고 있었지. 나는 두려움을 숨기고 아무도 없는 둘레길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걸었어. 그리고 속으로 '무인도에서 혼자 살 때 꼭 필요한 물건 세 가지'에 대한 현실적인 답을 진지하게 찾기 시작했지. 가방 속에는 배 타기 전 먹다 남은 반건조 오징어 절반 정도와 방울토마토 15알이 있었어. 이 정도면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 하루에 먹어야 하는 최소량의 오징어와 토마토는 어느 정도일까? 멀리서 개미처럼 보이는 몇 사람을 발견할 때까지 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시간은 계속됐어. 불안함에 눈이 멀어 내가 선장님의 말씀을 하나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어.
나의 낯선 느낌과는 상관없이 차귀도는 예뻤어.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절경은 직접 간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특권을 주었지. 거칠고 강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헝클어뜨렸어. 그런데 머리를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더라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과 내 머리카락이 같은 방향으로 날리고 있는 게 좋았던 것 같아. 나도 이곳에 일부가 된 듯했으니까. 그렇게 주변과 닮아가며 나는 조금씩 차분해졌어. 아마도 그때 내게 제일 필요했던 건 소속감이었는지도 몰라. 멀리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다시 확인했어. 그리고 내 마음대로 나는 섬도, 저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지. 그야말로 내 마음대로였지만 마지막엔 오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걸 보면 나름 효과는 있었던 것 같아.
차귀도는 숙소에서 꽤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어.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여행을 선호하긴 하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일탈도 필요한 것 같아. 먼 곳에서 내 숙소 쪽을 보니 며칠 전 힘들어 완주하지 못했던 길이 손톱보다 작게 보였어. 내가 아는 제주도가 실제는 서귀포에 있는 작은 읍 정도라고 누가 말해주는 듯했지. 한 달 동안 열심히 제주도를 걸었는데 처음 세웠던 계획은 떠나기 하루 전인 그날도 여전히 계획으로 남아 있었어.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아도 뒤돌아보면 하나도 안 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인생이라더니 한달살이도 그렇구나 했어.
다행히 배는 약속 시간에 맞춰 들어왔어. 선장님을 다시 뵈니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허기가 지더라. 그래서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머릿속으로 정성 들여 소분했던 방울토마토를 한꺼번에 다 먹었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토마토였지. 든든해진 배를 손으로 만지며 인근에 있는 가게에서 들리는 사람 소리를 음악처럼 들었어. 그리고 그새 내 흔적을 지운 바다를 바라봤지. 처음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와 마주한 바다는 흔적이 없음을 서운해하지 말라고 덤덤하게 알려주는 듯했어.
다음 날은 제주살이 마지막 날이었어. 그날도 늘 하던 대로 걷기로 했지. 큰 고민하지 않고 내 제주도 아지트였던 송악산을 가기로 했어. 여태 잘 지냈으니 인사는 하고 떠나는 게 동방예의지국의 법도니까. 숙소를 나와 익숙해진 시골길에 들어섰어. 양쪽 밭에는 마늘을 수확하는 작업이 한창이었지. 마늘은 뽑아서 바로 들고 가는 게 아니더라고. 밭에 며칠 두는 듯했어. 덕분에 그동안 나도 지나다니며 마늘의 알싸한 향을 실컷 마셨던 것 같아. 서양사람들은 마늘 냄새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라 그런지 괜찮았어. 육지에서 제주산 마늘을 볼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들겠다 싶었지. 다시 못 볼 마늘밭을 지나가며 이런 게 시절인연인가 보다 했어.
한참을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타났어. 올레길 표시인 감귤색과 파란색 리본은 왼쪽 길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더라고. 아무 생각 없이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잠시 멈췄어. 그리고 지도를 살핀 후 길을 바꾸기로 했지. 사람 흔적이 적고 물웅덩이가 많아 걷기 불편해 보였지만 상관없었어. 송악산은 이미 눈앞에 보였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거니까. 안전하고 검증된 올레길만 제주도는 아닐 거 아냐. 제주도에서 길 찾는 것 하나는 제대로 배웠으니 마지막으로 내가 할 일은 늘 걷던 올레길을 벗어나 새 길을 걷는 거였어. 배운 건 써먹어야 하니까 말이야. 울퉁불퉁한 샛길이 앞에 보였어. 내가 선택한 길이라 그런지 정갈하지 않아 더 걷는 맛이 있을 듯했지. 틀을 벗어난 시원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들어왔어. 그래, 바로 내가 찾던 그 순간이었어.
길에 가득 차 있는 물웅덩이를 어렵게 건넜어. 불편한 길이었지. 어떻게 하면 흙물이 조금이라도 덜 튈지 고민했고 순간순간 내딛는 발걸음은 매번 좋은 결과를 내는 것도 아니었어. 그럼 어때. 조금 어리석게 걸으면 어때. 바지에 묻은 흙은 털면 그뿐이었어. 천천히 가까워지는 송악산은 해무로 뒤덮여 흐릿하게 보였어. 근처에 있는 산방산,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도 흰색 크레파스로 덧칠하여 형태를 뭉개버린 것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 그래도 섭섭하지 않았어. 좋아하는 이의 다양한 모습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숨어 있는 것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어. 그리고 잘 지내다 간다고 속으로 말했지. 언젠가 다시 보게 된다면 환하게 웃으며 반갑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지내다 간다고 생각했어.
제주도에서 한 달을 지내며 내가 선택한 건 길이었어. 걸었던 길은 고요했고 또 매일이 달랐지. 공항으로 가던 중, 한 달 전에 본 청보리가 누렇게 변한 채로 바람에 흔들리는 걸 봤어. 덩달아 제주도에서 걸었던 내 시간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 길 위에 있는 발자국도 바람 따라 곧 지워질 거야. 흔적 없이 들어와 흔적 없이 돌아간다 생각하니 몸이 가벼웠어. 잘 지내다 가는 것 같았거든. 다시 돌아온 내게 엄마가 물었어. 한달살이가 끝나니 기분이 어떻냐고 말이야. 나는 실컷 걷고 왔으니 됐다고 말했어. 시원도 섭섭도 하지 않고 가벼운 상태라고 보고했지. 엄마는 웃으며 그럼 됐다고 했어. 나의 제주도도 떠나는 내 등 뒤에서 비슷하게 웃고 있으면 좋겠어. 잘 지내다 가면 됐다고 가볍게 손 흔들어주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