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수 같은 구글 지도 님께

일본 한달살이 : 길 찾기

by 마나

일본에서 지낸 지 벌써 2주가 넘어가. 아무래도 이번 한달살이는 적응하느라 애쓰고 나면 끝이 날 것 같아. 이쪽이 적응되면 저쪽이 삐걱거리니 말이야. 매일 혼자서 전쟁을 치러. 다행히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큼의 고통만을 주신다잖아. 그래서 힘들지만 나도 어설프게나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라. 오늘은 구글 지도가 말썽이었어. 자전거로 삿포로를 다니는 게 익숙해지고 나니 이젠 제 차례라는 듯 처음이랑 말을 바꾸기 시작했거든.


"미루카난!", "미루키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어로 대화하던 녀석이 갑자기 달라졌어. 일본어 같았지. 처음엔 소리가 작아서 잘못 들은 줄 알았어.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들어봤는데 확실히 영어는 아니더라고. 어제 내가 히라가나를 뗀 걸 알고 이러는 건가? 갑자기 변한 내비가 어이없어 혼자서 싱거운 농담을 했어. 그리고 나도 모르게 언어 변경 버튼을 눌렀을지도 모른니 다시 되돌리려고 지도앱을 뒤졌지.


무딘 내 눈에는 어딜 봐도 언어를 바꾸는 기능은 없었어.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더욱 없었지. 어쩌겠어. 지도는 이미 다른 언어로 뚝딱거리고 있고 나는 그 이유를 못 찾고 있으니 답답한 사람이 맞추는 수밖에. 다행히 방향 표시는 그림이잖아. 좀 귀찮긴 하지만 자전거로 달리다 잠시 서서 지도를 보며 확인하는 방법이 있었어. 지도상으로 거의 직진만 하면 가고자 하는 공원에 도착할 수 있다 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직진만 하자고 생각했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예상보다 시간이 더 많이 들었어. 조금씩 방향을 틀어야 할 때를 놓쳐 몇 번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와야 했거든. 자전거 타는 것까지 재미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길거리에 서서 울먹거렸을지도 몰라. 내비는 계속 "뭐뭐 미루카난!" "뭐뭐 미루키니"를 외쳤어. 아무 소리가 없는 것보다는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뭐라도 들리는 게 내 심신에 도움이 됐기 때문에 내비 목소리는 최대한 크게 해 놓은 상태였지. 저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반복되는 소리에 자동으로 나도 "미루카난!", "미루키니!"를 따라 하며 페달을 밟았어.


그러다 갈림길이 나왔어. 구글 지도는 오른쪽으로 가라는 화살표를 보여주고 있었지. 그때, "미루카난!"이란 소리가 들리는 거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 혹시 오른쪽으로 돌아란 뜻은 아닐까. 확실히 알 순 없지만 영어 내비도 제일 많이 하는 말이 "Turn Right!", "Turn Left!"이었으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어. 내비가 다시 말을 할 때까지 조용히 귀 기울이며 열심히 페달을 밟았지. 그리고 "미루키니!"란 말이 나왔을 때 잽싸게 내비를 봤어. 예상대로 화살표 방향은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어.


이젠 확신을 가지고 행동해 볼 차례였어. 내비가 "미루카난!"이라 말했을 때 폰 화면을 보지 않고 바로 오른쪽으로 자전거를 틀었어. 그리고 또 달렸지.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또 똑같은 소리가 나는 거야. 그럼 나도 똑같이 행동해 주면 됐어. 마치 길을 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우회전을 한 후 자전거를 잠시 세웠어.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내비를 봤지. 남은 거리가 줄어든 것을 보니 잘 가고 있는 게 확실했어. 화살표 방향도 내 자전거가 가는 쪽으로 나란히 향하고 있었고. 확인 완료였어.


일본어로 우회전 좌회전이 저거구나. 히라가나만 알고 있는 까막눈인 내가 일본어 내비를 들으며 공원에 도착했어. 꽃이 많은 정원이었는데 어떤 것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질 않았어. 이미 내 머릿속엔 "미루카난"과 "미루키니"가 피어나고 있었거든. 갑자기 비가 와도 괜찮았어. 빗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멈추고 폰을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내비 음성만으로 자전거를 탔지. 비를 맞아도, 배가 고파도 내가 찾은 좌회전, 우회전 소리를 들으며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마냥 좋았어.


비가 그치고 나니 금세 햇볕이 쨍쨍 내리쬈어. 숙소에 도착할 때쯤엔 비가 온 흔적을 없애듯 젖었던 내 모자와 웃옷도 다 말라 있었지. 삿포로 날씨를 닮아 내 한달살이도 한 치 앞을 못 보는 건가 싶어 혼자 피식 웃었어. 그리고 바로 영어를 할 수 있는 숙소 주인에게 달려갔어. 그리고 자신 있게 "Turn Right"이 일본어로 '미루카난'인지를 물었지.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거야. 그리고 일본어로는 다른 표현을 쓴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 어? 그럼 저건 무슨 언어지?


주인과 나는 한참을 이야기했어. 그리고 서로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크게 웃었지. 그 대화를 끝으로 더는 무슨 언어인지 알 수 없는 "미루카난"과 "미루키니"를 파고들지 않기로 했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았거든.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좌회전, 우회전을 뜻하는 표현인 건 맞으니까 말이야. 지도 앱에 더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모국어로 바꿔 당당하게 안내를 받을 날이 오겠지. 피곤했던 나는 "미루" 형제들이 변신하기 전까진 아무 생각 없이 평화를 즐기기로 하고 지도 앱을 껐어.


요즘 내가 제일 의지하는 게 구글 지도야. 안 그래도 일본어를 몰라 까막눈으로 살고 있는데 지도마져 없으면 더 캄캄하게 살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고마우면서도 싫은 것 같아. 매일 아침 일어나면 구글 지도부터 찾으면서도 내가 폰 없이 하루도 못 산다는 사실이 무기력하게 느껴지거든. 일본 한달살이 마지막 주에는 내가 아지트라고 정해 놓은 장소만이라도 내비 없이 갈 수 있으면 좋겠어. 그래서 진짜 혼자서 길을 달려 보고 싶어. 열심히 노력 중이긴 한데 과연 길치 탈출이 가능할까.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여태 지내온 시간으로 예측해 보면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커. 구글 지도를 켜놓고도 매일 길 위에서 헤매고 있으니 아직 나에 대한 믿음은 안 생기거든. 이왕 한 달 꼬박 갈 곳을 찾지 못한다면 이참에 불안에 익숙해지는 것도 괜찮을 듯해. 어떤 하루가 됐든 오늘처럼 내일의 끝도 웃을 수 있기만 한다면 말이야. 일본은 내게 낯선 곳이잖아. 이곳에서 지내는 게 한달살이 목표니 잘하고 못하고는 크게 생각하지 말자고. 그래, 내일도 주어지는 대로 그냥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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