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달살이 : 히라가나 외우기
"사...투...호...로...?? 샅호로?? 삿포로!"
며칠 전, 삿포로 지하철 역을 걷다가 반복해서 보이는 글자를 발견했어. 폰에 든 히라가나 표를 꺼내기 귀찮아 몇 번 무시하고 넘어갔는데 얼마 못 가 또 보이는 거야. 더는 뒤가 켕겨서 넘어갈 수가 없었어. 나는 누가 강제로 시키는 것처럼 괜히 툴툴거리며 가던 길을 멈추고 폰을 꺼냈어. 그리고 한 글자씩 대조해 가며 음을 읽었지. 중간에 두 글자가 합쳐져 '포'자가 된 원리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어. 삿포로에서 지내며 일본어로 '삿포로'도 읽지 못했던 내가 처음으로 진짜 '삿포로'를 본 순간이었으니까. 너무 반가웠어.
요즘은 길거리에서 걷고 서고를 반복해. 간판들이 길 가는 나를 자꾸 잡아당기거든. 그럼 나는 몇 발자국 못 가고 간판 앞에 서서 한참을 있어야 해. 일본어 철자표와 눈앞에 글자를 대조해서 읽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야. 아직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림 같아 보이는 일본어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음을 엮어가는 걸 보면 나도 히라가나에 익숙해지고 있긴 하나 봐. 지금 내 수준으로는 뜻까지는 바라면 안 될 것 같아. 뒤돌아서면 까먹는 나이에 시작한 일본어 배우기니 큰 기대도 금물이고 말이야. 그저 하나라도 읽고 즐거우면 된 거라고 생각해.
"아...로...하... 알로하!!"
어제도 한 가게 앞에 섰어. 그리고 이번에는 표를 보지 않고 간판을 읽어보려고 노력했지. 한참을 걸려 한 자씩 음을 읽었는데 내가 아는 하와이 인사말이 나왔어. 얼마나 반갑던지. 표를 보지 않고 스스로 읽어냈다는 성취감에 또 혼자서 으스댔어. 누가 보면 내가 일본어 자격시험이라도 친 거라 생각했을 거야. 일본에 살기 시작하며 글자 읽는 재미가 붙었어. 한달살이는 짧게 여행하는 거와는 달리 일본 생활을 경험하는 거잖아. 일본어를 모르면 겉만 핥다가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시작한 거였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내가 있는 곳의 규칙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생활을 배우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글자에 흥미가 붙는 만큼 길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늘었어. 배고픈 길고양이가 먹이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렸지.
어릴 때 ㄱ,ㄴ,ㄷ,ㄹ을 이렇게 배웠겠구나 싶었어. 온 세상이 일본어 교과서더라고. 간판 앞에서 전날 외운 히라가나가 또 기억나지 않아 표를 무한반복해서 봤어. 이걸 또 잊어버렸구나? 금붕어 기억력과 맞먹는 나를 보며 혼자서 어이없어 낄낄거리며 웃었어. 한참 모자란데 또, 포기할 생각도 없더라고. 아마도 나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고 싶다기보다는 하나씩 배워가는 시간 자체가 즐거운 것 같아. '알로하' 하나에 기분 좋아졌으면 됐다 싶었어. 그리고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어로 잘 놀아보자고 생각했지. 어설픔 그 자체가 나였어.
오늘은 일요일이라 숙소 근처에 맛있다고 소문난 우동집에 가기로 했어. '하나마루'라는 체인점이었는데 면발이 더는 쫄깃할 수가 없다 하더라고. 맛깔난 리뷰를 읽고 침을 꼴깍 삼켰어. 그리고 당장 자전거를 끌고 나갔지. 가게 근처에는 우동집 말고도 여러 개의 음식점이 있었어. 한꺼번에 보이는 일본어 간판이 순간 숙제처럼 느껴지더라고. 글자가 다시 그림으로 돌아온 듯했어. 그때, 마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도 들렸어. 정신 차리라는 종소리 같았지. 나는 겸연쩍게 배를 한 번 쓰다듬었어.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 있는 간판들 제대로 읽은 후 점심을 먹겠다고 다짐했어.
옅어진 기억력을 다시 모았어. 그리고 천천히 첫 가게부터 읽을 수 있는 글자를 읽었지. 가타카나와 한문까지 섞여 있어서 절반 이상은 알아볼 수 없었어. 그래도 나머지 절반은 히라가나잖아. 금세 까먹더라도 지금은 외우자 생각하며 읽을 때까지 기억을 더듬었어. 점점 커지는 꼬르륵 소리에 마음이 다급해졌지만 재미가 있어 10분 정도는 더 놀기로 했지. 살면서 간판을 그렇게 자세히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10초에 하나씩 글자 음이 기억나더라. 흥이 점점 더 올랐어.
마지막으로 우동 가게 앞에 섰어. 가게 앞에 붙은 음식 사진에서 이미 이곳이 '하나마루' 우동집인 걸 알았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간판만 봤어. 그리고 글자를 읽기 시작했지. 첫 글자부터 막히더라. '하'를 기억해보려고 했지만 10초가 지나도 머릿속이 깜깜했어. 다행히 그 뒤에 나오는 '나'와 '마'는 내 필명에 들어가는 거라 바로 읽었고 '루'는 생김이 재미있어서 쉽게 외웠던 글자라 기억이 나더라고. 거기까지면 됐다 싶었어. 앞머리 하나 몰라도 우동은 잘 먹을 수 있다며 허풍을 떨었지. 그리고 '나마루'를 읽은 게 어디냐며 당당하게 식당으로 들어갔어.
우동 그릇에도 '하나마루'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어. 바로 옆에 '우돈'이라 적혀 있었고 말이야. 하나마루 우동은 리뷰에서 본 그대로 입 안에서 제대로 쫄깃거렸어. 맛있는 면을 열심히 씹으며 '하'자를 보니 글자도 쫄깃거리며 내 머릿속에 쏘옥 들어오더라고. 숙제를 다 끝냈다는 성취감이 가미되어 말 그대로 우동 맛은 최고였어. 히라가나를 떼면 다시 한번 더 가려고. 그때는 오늘 읽었던 간판들을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겠지? 그러면 음식이 더 맛있으려나?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솔솔 불었어. 배도 부르고 시원하고 자전거는 재미있었지. 특별할 것 없는 일요일에 잠시 점심 먹으러 나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더도 덜도 말고 딱 오늘만큼만 내일도 살자 싶더라. 히라가나에 익숙해지고 나면 가타카나로 넘어갈 거야. 점점 더 많은 간판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지금 못 보는 또 다른 일본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가타카나를 배우는 과정에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이 헤맬까. 정신없겠지만 간판 앞에 딱 붙을 준비는 끝났으니 된 거 아닐까. 더 맛있는 우동을 먹기 위해서라도 내일 또 열심히 헤매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