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달살이 : 기본
숙소 주인이 3박 4일 동안 가족 여행을 갈 거라 했어. 집 열쇠를 주며 근처에 친척이 사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 건네받은 열쇠가 낯설어 괜히 손으로 조몰락거렸어. 남의 집에서 혼자 지내본 적이 없어 그랬을 거야. 왠지 모를 책임감과 혼자 지내면 편할 거란 기대감이 동시에 올라왔어. 그리고 주인이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나 보다 싶어 어깨도 살짝 으쓱거렸지.
처음엔 의외로 허전했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은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든다는 걸 알 것 같았지. 주인 부부가 없는 집에서 나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던 것 같아. 아무도 없어서 괜히 누군가 숨어 있을 듯한 상상이 됐거든.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그'를 확인하고 나서야 몸에 긴장이 풀리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슬슬 혼자만의 주말을 즐길 준비를 시작했어.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싼 온천 말고도 동네 목욕탕이 몇 군데 더 있다는 걸 알았어. 그 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도 하고 근처 맛집도 가곤 했지. 오늘이 그날이었어. 나는 나가기 전에 방 정리부터 시작해 청소기도 돌리고 빨래까지 끝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도 씻기 위해 목욕탕으로 갈 준비를 했지. 꼼꼼히 문단속을 하고 있으니 이 집이 마치 내 집 같더라고. 하긴 내가 머무는 곳이니 내 집 맞잖아. 저녁에는 집도 나도 깨끗하겠다 싶어 벌써 기분이 좋았어.
일본은 동네 목욕탕이라도 물의 질은 유명한 온천과 크게 다르지 않아. 가격도 500엔이라 한국보다 저렴하고 말이야. 대신 그 외 다른 물품들은 거의 없어. 수건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 못해 마실 물도 없더라고. 목욕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다시 돈을 내고 사던지 아니면 참아야 했어. 군더더기 없는 목욕탕에는 담백한 일본인들의 성향이 그대로 들어 있는 듯했지. 목욕하는 내내 목이 마르긴 했지만 기본을 중시하는 그들의 깔끔함이 나는 좋았어.
정확히는 몰라도 목욕탕에는 거의 동네 주민만이 있는 듯했어. 그들 속에 있으니 나도 딱 현지인 같더라고. 지난달 제주도에서 한달살이를 할 때 지역 주민만이 가득 찬 절에서 능청스럽게 밥 얻어먹고 나왔던 기억이 났어. 그리고 그 시간을 발판 삼아 일본 목욕탕에서도 별 무리 없이 잘 섞여 있었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신 수건과 내 것이 살짝 달라 보이는 것 외엔 크게 다른 건 없었어.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걸 보니 성공했다 싶더라고. 경험치가 쌓이며 나의 능청 수준도 높아지고 있는 중이었어.
목욕이 끝난 후 근처에 있는 동네 우동집에 갔어. 그곳도 목욕탕과 비슷하게 우동에 별다른 고명 없이 국물과 면만 있었지. 밋밋하게 생긴 거와는 달리 국물은 진했고 면은 젓가락으로 집는 순간부터 쫄깃거렸어. 내 입에서 자동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올 정도였으니까. 오동통한 면을 열심히 먹고 있는데 문득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동에는 면이, 목욕탕에는 물이 최고인 동네에 살고 있어서 말이야. 나도 사회적 명함 다 떼고 한달살이를 하며 살고 있는 지금 모습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닮고 싶은 곳에 머물 수 있어 고마웠어.
일본에 있으면 기본을 계속 생각하게 돼.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크든 작든 기본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거든. 우동처럼 언뜻 보면 밋밋해 보이지만 기본에 대한 그들의 고집에는 깊이가 있더라고. 저들의 고집을 나도 배울 수 있을까. 진짜 내 모습만 가지고도 세상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목욕탕 가는 기분으로 하루씩 살다 보면 좀 더 담백한 길이 나오겠지. 생각만으로도 홀가분해. 매일 하나씩 버리고 살라던 법정 스님의 말씀도 떠오르고 말이야.
다시 숙소로 돌아오며 남의 집에서 내가 지켜야 할 기본은 뭘까를 생각했어. 혹시 청소는 아닐까. 일단 깨끗하면 내가 편안하고 그래야 머무는 동안 내 집 같을 테니까. 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가 집을 내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야. 남의 집을 내 집같이 여기며 주말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청소만 잘 하고 살아도 많은 곳이 내 집이 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가성비 좋은 거래가 어디 있겠어. 그러니 숙소 주인 내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 집인 듯 내 집 아닌 곳에서 기본 잘 지키며 살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