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을 동경하되 곡선을 사랑하라

일본 한달살이 : 아지트

by 마나

그거 알아? 자연에는 직선이 없대. 자전거를 타고 길을 지나다 보면 이 말이 더 실감이 나. 두 바퀴가 땅을 그대로 타고 지나가니까 나도 덩달아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며 울퉁불퉁한 길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거든. 대부분의 길은 멀리서 보면 곧게 뻗은 직선인데 가까이 보면 작은 곡선들의 집합이야. 언젠가 쭉 뻗은 듯해 보이는 길에 접어들었다가 숨어 있던 자잘한 땅의 굴곡에 엉덩이가 내 대신 무차별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어. 어찌나 아프던지 평생 지은 죗값 갚으려고 한꺼번에 볼기를 맞은 듯했다니까.


길은 올해 들어 내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걷고, 자전거도 타고 가끔은 퍼질러 앉아 싸 온 간식을 먹기도 하지. 내 앞에 놓인 구불거리는 길을 보며 어쩌면 직선은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더 끝없이 열망하게 되는 곳 말이야. 나도 매일 아침 평평한 길을 지나길 바라지만 자전거를 타고 5분만 지나면 꿀렁거리는 몸을 통해 현실을 자각해. 나태주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고 했잖아. 가까이에서 보는 길에는 늘 굴곡이 보여. 그럼 직선보다는 곡선이 더 예쁜 걸까? 그런데 왜 나는 직선을 포기하지 못하고 매일 바라는 걸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적이 있어. 툭 튀어나온 곳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다 바퀴가 걸렸거든. 앞으로 나가는 힘이 크지 않아서 자전거는 살짝 공중에 떴다가 내려왔어. 그리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에 있는 잔디밭으로 떨어졌지. 실제로는 내 몸이 땅으로 닿을 때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그 사이 과정이 슬로모션처럼 생생했어. 떨어지는 걸 예상하고 떨어져서 그런지 다행히 살포시 땅에 내려앉은 것처럼 다친 곳은 없었어.


자전거에 익숙해지는 만큼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때였어. 땅의 냉기를 느끼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지. 누군가가 나에게 굴곡진 인생길 위에서는 한시도 방심하지 말고 긴장하라고 알려주는 듯했어. 나는 군기가 바짝 든 채로 허공에 대고 '감사합니다' 혼잣말을 하며 일어났어. 그리고 처음 자전거를 탔을 때보다 더 천천히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지. 긴장한 나와는 달리 달리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그뿐이라는 듯 주변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 어린아이가 넘어졌을 때 부모가 크게 반응하지 않으면 금세 일어나서 생글거리잖아. 나도 마찬가지였어. 갈 길이 멀어 넘어졌다고 징징거릴 틈이 없었지. 덕분에 많이 아프지도 않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 같아. 울퉁불퉁한 길을 유연하게 지날 수 있게 훈련을 하는 중이라 생각했어.


한참을 달려 내 일본 아지트인 모에레누마 공원에 도착했어. 중앙에 인공으로 만든 언덕이 있는 곳이었지. 보통의 산은 정상까지 가는 길이 둘러 있잖아. 그런데 이곳은 길이 쭉 뻗어 있더라고. 사람들이 꿈꾸는 직선을 어설프게나마 현실에 그려놓은 듯한 느낌이었어. 물론 가까이서 보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의 연속이었지만 말이야. 꽤 높은 언덕이었는데 '일(一) 자'로 쭉 뻗은 길 덕분에 밑에서 출발하면 10분 정도 지나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어. 여기가 유토피아인가. 나는 현실에 있는 자잘한 곡선을 무시하고 직선이다 생각하며 천천히 언덕을 올랐어. 꿈꾸듯 걷는 그 시간이 좋아 매번 여길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었지.


멀리 있는 야구장에는 경기를 시작하려고 선수들이 준비 중이었어. 사람들이 개미보다 더 작아 보이더라고. 나도 야구를 보려고 정상에 있는 잔디밭에 퍼질러 앉았어. 그리고 가방에 있는 식빵을 꺼내 한 움큼 입에 넣고 오물거렸지. 열심히 공을 던지며 몸을 푸는 선수들을 보니 문득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궁금해지더라. 던질 때마다 기술이 다르게 들어갈 거잖아. 굴곡진 공의 흐름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지가 야구 경기의 핵심인데 언덕 위에서는 너무 멀어 그걸 볼 수 없었어. 그 순간, 역시 가까이에서 봐야 예쁜 게 맞는구나 싶더라고. 곡선을 볼 수 없는 야구 경기는 현실감이 떨어져 집중이 잘 안 됐어. 어느 순간부터는 야구보다 입에 든 식빵에 더 몰입했지. 그리고 먹는 게 물릴 때쯤 자리를 털었어. 나는 직선을 동경하지만 곡선을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어.


그렇다고 곡선이 내게 늘 친절하지는 않아. 굴곡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쳐주는 스승 같지. 곡선으로 된 길 끝에는 언덕을 오를 수 있는 직선의 길이 다시 펼쳐져. 그리고 현실이 이상이고 이상이 현실인 그곳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지. 내 아지트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에레누마 공원만이 아니라 숙소에서부터 언덕 정상까지 쭉 이어진 길이야. 현실과 상상이 공존하는 나만의 길이거든. 공원을 오가며 온전히 길을 느낄 수 있으니 어찌 자주 오지 않을 수 있겠어. 자연에는 직선이 없지만 그래서 더 찾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도 달리고 걸어. 아니, 어쩌면 직선을 찾는 척하면서 곡선을 더 느끼고 싶은 건지도 몰라. 가다 보면 뭐든 나오겠지. 사랑하며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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