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향수병

일본 한달살이 : 매운맛

by 마나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이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밥을 한술 뜨기 시작할 때부터 어릴 적 부르던 노래 구절이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어. '고향에도 지금쯤 뻐억국새 울겠네.' 노랫말은 내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입에서 저절로 나오더라고. 한 번 튼 음악은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이 됐어. 나도 오랜만에 떠올린 노래가 싫지 않아 떠오르는 대로 그대로 뒀지. 실제로 식당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 음악이 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향 땅과 이곳의 거리를 반복적으로 측정하고 있었어.


그날도 큰 기대 없이 문고리를 잡았어. 다행히 식당은 아직 영업 중이었지. 일본에는 점심시간 잠깐만 문을 여는 식당들이 제법 많아. 마감 시간이 오후 5시라 적혀 있어도 말이야. 그래서 오후 2시만 넘어가도 내가 원하는 곳에서 식사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았어. 자전거 타느라 정신없어 늦은 건 나니 누굴 탓하겠어. 원래는 근처에 맛있는 빵집이 있다 해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 공원에서 먹을 예정이었는데 내가 갔을 땐 이미 빵이 다 팔린 후더라고. 어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는지 깨끗한 선반이 어이가 없었지. 그 식당은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이었어. 점심시간이 지나갈 때쯤이라 허탕 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문고리를 잡았는데 문이 열리니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어. 오늘은 제때 밥을 먹겠다 싶더라.


땡볕에서 노릇하게 굽힌 나를 식히기 위해 종업원이 가져다 주신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어. 허기는 지는데 딱히 먹고 싶은 메뉴는 없어서 추천해 주신 대로 시켰지. 맛에 대한 기대보다는 굶지 않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더 컸어. 간장을 기본으로 한 일본 음식이 지겨워진 상태였으니까. 한국 음식과 비슷한 게 많기 때문에 일본 한달살이를 계획하며 먹거리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3주가 넘어가니 두 나라 간의 미묘한 맛 차이가 내 입맛을 더 떨어뜨리더라고. 그래서 며칠 째 빵집만 돌아다니던 참이었어.


태국음식점이라 나온 음식은 살짝 매콤했어. 눈물이 날 만큼 매운 건 아닌데 갑자기 울컥하더라고. 왜 눈물이 나는 거지? 음식이 맛있어서?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어. 옆에서 맛있게 식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면 더 그렇지 않을까? 옆 테이블을 의식하며 울지 않으려고 더 부지런히 음식을 입에 넣었어. 오랜만에 매콤함이 입안에 가득 찼지. 겉으로 봤을 땐 이상했을지 몰라도 나는 매운맛에 정신이 번쩍 들어 울고 웃으며 신이 났던 게 틀림없었어.


오랜만에 느끼는 만족감이었어. 식사가 끝난 후 종업원이 서비스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주셨지. 속이 든든해진 나는 이제 제법 자연스러워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내뱉으며 식당을 구경했어. 가게 구석에는 여러 가지 장신구가 있었는데 특히 개들이 요가를 하는 석고상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진지하게 자세를 잡고 있는 개들이 귀여워 계속 눈길이 갔어. 너네들도 입맛에 맞는 밥을 챙겨 먹은 후라 여유로운 거구나 싶었지. 잘 먹지 못해 날카로워져 있을 땐 존재도 몰랐을 그들이었어. 만나서 반가웠고 그래서 감사했어.


식당을 나오며 곰곰이 생각을 했어. 그리고 내가 매운 음식에서 고향을 느꼈다는 걸 알겠더라고. 의식하진 못했지만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서러웠었다는 것도 말이야. 매운맛이 반가워 눈물이 났다고 누구한테 말할 수 있겠어. 어이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었어. 갑자기 해맑아진 내 모습을 보며 앞으로 더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남들은 삿포로에 식도락 여행을 온다는데 나는 그렇진 않은 것 같아. 평소에 식사는 끼니를 때우면 되는 거라 여기고 말았는데 입맛에 맞는 밥을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이제야 알겠더라고.


점점 무기력해지는 나를 보며 일본이 나와 맞지 않는 건지, 한달살이로 떠돌아다니는 게 이제 무의미해졌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찰나였어. 다행히 둘 다 정답이 아니었지. 나는 그저 밥을 만족스럽게 먹지 못해 시무룩했던 것뿐이었어. 세상 일은 생각보다 단순한 데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아. 나도 나를 너무 파고들면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한국을 생각하며 그리워했던 것까지 모두 맛있는 걸 못 먹어서였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맛집 찾는 거뿐이야. 참 쉽지?


내일도 오늘처럼 뭐든 정성스럽게 먹을 거야. 밥이 든든하게 들어가야 생기도 생기고, 또 일본에서 고향 땅 찾으며 청승 떠느라 시간 보내는 대신, 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지금을 잘 살아야 나중에 진짜 한국에 돌아갔을 때에도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거잖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기 위해 1년 휴직을 하고 떠돌아다니는 거니 걱정 대신 좋은 것만 생각하고 먹으며 지내자. 일단 골치 아픈 향수병 먼저 깨끗하게 씻어 분리배출하고 말이야.

일본 태국 음식.jpg
일본 태국음식점 장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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