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달살이 : No More 내비
나는 길 찾는 게 어려워. 똑같은 길이라도 갈 때와 올 때가 다르게 보이거든.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더라고. 다행히 살면서 길 못 찾는다고 놀림을 받거나 불편했던 적은 없었어. 가끔 사람들과 같이 여행을 갈 때도 미리 길치 선언을 하고 당당하게 뒤로 빠지는 수법을 썼지. 그리고 편안하게 뒤에서 사람들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걷곤 했어. 덕분에 내 앞에는 길이 아니라 늘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등이 있었던 것 같아. 고생 없이 응석받이로 자란 탓에 부족한 능력은 성장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릴 적 수준 그대로였어.
그런 내가 오늘은 앞장서서 길을 나섰어. 신청했던 데이터 로밍 기간이 끝났거든. 데이터가 들어오지 않는 폰은 나보다 더 길치라서 앞세울 필요가 없더라고. 기간 연장을 하려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은 일주일 동안은 폰을 사용하지 않고 아날로그식으로 일본에서 지내보자고 마음먹었어. 나도 이제 혼자서 길을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 길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쩔쩔매다 반성하고 다시 로밍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오늘은 여태 익힌 길을 기억하며 돌아다녀 보기로 했어. 내 한달살이 로망인 '진짜 현지인'인 것처럼 말이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만의 도전이었어.
숙소 앞에서 자전거 타이어 공기압까지 체크한 후 천천히 익숙한 곳을 벗어났어. 처음에는 긴장해서 미어캣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길을 확인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익은 간판들이 보여 더는 두리번거리지 않게 되더라고. '어랏, 제법 길을 알겠는데!' 홋카이도 대학이 어디쯤인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아.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지. 신명 나게 자전거 페달을 돌렸어. 뙤약볕이 내리쬐여 등줄기에서 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어. 식은땀 흘리는 순간도 없었고 말이야. 그새 없던 길눈이 뜨인 건가. 흥이 돋은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어. 오롯이 나만 믿고 달리는 꿈 같은 길이었지.
"북13서5... 북12서5..." 길에 있는 표지판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목적지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리고 일본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독립 만세를 계속 외쳤지. 나도 할 수 있구나 싶었거든.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손에 폰을 꼭 쥐고 하루만이라도 헤어지길 바라기만 했는데 그날이 바로 다음 날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스마트폰 없이는 숙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창살 없는 감옥살이가 이제야 끝나고 있었어. 시원한 바람이 독립에 딱 맞는 길동무였지.
홋카이도 대학 근처에 다 달았을 때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하나둘 보였어. 그들도 모두 나처럼 구글 지도를 보지 않고 앞만 보며 자전거를 몰고 있었지. 나도 그들과 같이 호흡을 맞춰 달리며 수업을 받으러 가는 듯한 표정을 지었어.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더라고. 이제 내가 삿포로는 어느 정도 아는구나 싶었어. 좀 더 일찍 구글 지도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욕심이 올라왔지만 그래도 아직은 돌아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탄 후는 아니라고 애써 생각하기로 했어.
오는 길에는 독립을 축하하며 작은 라멘 집에서 미소라멘도 시켜 먹었어. 한국 라면보다 더 기름진 것 같아 뱃살 보호 차원에서 여태 망설이기만 했는데 또다시 용기를 냈지. 몸보신하는 것처럼 땀이 쭉 나더라고. 신나게 먹으며 왔던 길을 다시 복기해 봤어. 그동안 나는 왜 길 위에 있는 간판과 표지판을 무심히 보고 넘겼던 걸까. 진작에 알았으면 그리 오랫동안 폰에 집착하며 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몇 번 왔던 곳이었는데 폰이 있던 자리만큼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겨 예전보다 길 위어 더 많은 게 보이나 보다 했어.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의기양양했어. 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거든. 앞으로 남은 날들도 무사히 귀가하는 날들로 채워지겠지? 오늘부터 길잡이는 구글 지도가 아니라 나야. 불안하더라도 평생 응석받이로만 살 수 없으니 길거리에서 우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나가고 보자고. 되돌아보면 일본에 온 첫날에도 길 찾는다고 고생했지만 결국 숙소를 찾았잖아. 지금은 그때보단 훨씬 안정된 상태니 어딜 가든 잘 돌아올 거야. 폰보다 더 듬직한 나를 믿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