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일본 한달살이 : 장미 정원

by 마나
일본 장미 정원9.jpg

귀신한테 홀린 게 틀림없어. 그 외엔 조금 전 나를 설명할 말이 없을 것 같거든. 홋카이도에 있는 장미 정원을 여섯 번 다녀오고 난 후였어. 삿포로에 살면서 일본 사람들이 왜 정원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 가기 시작한 곳이었는데 갈 때마다 새롭더라고. 그 이유를 찾고 싶었어. 나도 보면 볼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숨은 보물을 캐러 정원에 가고 또 갔어. 그리고 찾은 것들을 한 편의 글에 꾹꾹 눌러 담았지. 글이 완성되고 나니 그제야 정원을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았어. 역시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러 번 봐야 하는구나 싶었지.


꽃은 화려했고 일본인 정원사는 소박했어. 겉으로만 보면 거의 정반대인 듯한 둘이 정원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지. 꽃을 자세히 보니 꽃잎맥이 보였어. 복잡하게 얽힌 맥들을 통해 물을 빨아들이며 성장했을 거야. 씨앗이 꽃이 되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견딘 흔적이었어. 매일 정원을 가꾸는 일본인의 땀과 닮아 보였지. 평범한 둘의 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정원이 늘 새로웠던 거구나. 정원사가 일하는 것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그가 꽃을 다듬듯 나는 그곳의 이야기를 글로 잘 다듬고 싶었지.


어떤 글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그냥 써지고 또 어떤 글은 며칠을 고민하고 나서도 별도로 다듬는 시간까지 필요하기도 하잖아. 이번 글은 후자 쪽이었어. 정원을 오고 가며 보냈던 순간들이 좋아서 글에 더 욕심이 들어갔거든. 과하게 채워진 글에 힘을 빼기 위해 시간이 제법 많이 들었어.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글이 되었으면 해서 열심히 다이어트를 했지. 최선을 다해 내 이야기에 일본인의 소박함을 넣으려고 노력했어. 장미처럼 당당한 필체로 말이야. 그래야 장미 정원의 진정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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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잠시 눈 깜빡할 사이에 컴퓨터 화면이 바뀌었어. '삭제된 글입니다.' 순식간이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지.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한데, 나도 모르게 내 손가락이 글 삭제 버튼을 눌린 게 틀림없었어. 그리고 이건 더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없어진 글을 알아채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무작정 억울함이 올라왔어. 혼자 있어서 다행이었지, 옆에 누가 있었다면 찰나의 울분이 몽땅 그쪽으로 갔을 거야. 그나저나 내가 왜 그런 거지? 고장 난 기계가 된 나는 무응답이었어. 1분 전 수정하려다 삭제 버튼을 눌리던 순간만이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어.


아무리 찾아도 한 번 삭제된 장미 정원은 되돌아오지 않았어. 글에 꾹꾹 눌러 담았던 이야기의 잔상은 아직까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지. 기록이 없으니 이것들도 점점 옅어졌다 사라지지 않을까. 떠난 글을 붙잡을 길이 없자 억울함에 허무함이 더해졌어. 그렇다고 같은 글을 다시 쓰고 싶진 않았지. 처음 썼던 글만큼 정성스럽게 쓸 의욕은 남아있지 않았거든. 나는 공기 빠진 풍선처럼 책상 앞을 빠져나와 침대에서 흐느적거렸어. 그리고 사라진 글과 함께 나도 침대 속으로 푹 꺼졌지. 누운 김에 잠이나 실컷 자자 싶었어.


다행히 잠은 보약이었어. 1시간 잤을 뿐인데 근본 없는 억울함이 살짝 가시더라고. 여러 가지 감정이 가라앉고 여유가 생기니 당황해서 내가 한 짓을 손가락에게 뒤집어씌운 순간까지 떠올랐어. 부끄럽기도 하고 어이도 없어서 혼자서 한참을 웃었던 것 같아. 웃음도 보약인지 '삭제된 글입니다'라는 문구를 봐도 더는 짜증이 나지 않았지. 그리고 이왕 이리된 거 삭제한 글도 덩달아 같이 잊어버리자고 마음먹었어. 기억만큼 망각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 잘 살고도 싶고, 글도 잘 쓰고 싶어 잘잘 거리는 나에게 욕심을 더 빼라고 손가락이 힘 좀 줬나 보다 했어.


불행이 찾아오는 건 익숙해서 고마움을 못 느끼고 사는 것들을 다시 일깨워 주기 위해서 인지도 몰라.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글을 쓰며 살았는데 오늘은 문득 쓸 수 있어서 감사하단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야. 애써 쓴 글을 삭제한 바보 같은 순간까지 글쓰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내 삶의 모든 부분이 소중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해 주거든. 지금 나는 삭제된 글을 잘 보내기 위해 글을 쓰고 있어. 그 속엔 장미 정원을 보여주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나와, 당황해서 책임을 떠넘기고 싶었던 나도 들어 있지. 최선을 다해 살아도 가끔 더 힘들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는 거 이제 알겠지?


아무튼, 내 장미 정원은 충분히 소박했고 또 화려했어. 잘 가. 부디 다른 곳에서는 더 예쁘게 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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