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머리 매봉산

태백 한달살이 : 갈까 말까

by 마나

가고는 있지만 시큰둥했어. 매봉산은 차로 정상까지 갈 수 있다 했거든. 자고로 산은 땀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하는 거 아냐? 등산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걷지 않고 산을 가는 게 아깝더라고. 매봉산 이름도 생소해서 더 싱겁게 느껴지기도 했어. 안 갈 생각이 점점 모이고 있었지. 한 방울만 더하면 완성될 듯했어. 그래서 나는 서둘렀어. 생각이 굳어지면 겨우 시작한 한달살이를 숙소 근처만 돌아다니다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 일단 머리 대신 몸으로 태백과 만나야겠다 싶었어.


멀리서 여러 개의 풍력발전기가 바람을 따라 서서히 돌고 있었어. 저렇게 천천히 돌아도 에너지가 만들어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는 크고 길쭉하기만 한 게 멀대 같더라고. 그 와중에 산길을 많이 다녀본 적이 없어 겁도 났지. 속으로 돌아갈까 말까를 계속 고민했어. 산 중턱이라 차를 돌릴 곳이 마땅치 않아 갈까가 말까를 겨우 이기고 있을 뿐이었어. 고도가 높아질수록 매봉산 산길도 점점 좁고 가팔라졌어. 양방향으로 향하는 차들이 같은 길을 순차적으로 지나야 했지. 처음엔 조심스러워 다른 차보다 더 천천히 움직였어. 그런데도 차들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기다려주더라고. 덕분에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 같아. 오길 잘했단 생각이 처음 들었지. 매봉산에서 뜻하지 않게 제대로 된 운전 매너를 배운다 싶었어.


좁은 길을 지나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어. 바로 눈앞에 고랭지 배추밭이 펼쳐져 있었지. 매봉산 정상 근처에 배추밭이 있다는 걸 듣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넓을 줄은 몰랐어. 사방이 거의 배추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더라고. 나는 배추밭 규모에 놀라다가 밭에 가까워질수록 배추 크기에 한 번 더 놀랐어. 원래 배추가 저렇게 큰 건가. 하나같이 싱싱해 보이는 배추들이 질서 정연하게 산 정상에서 자라고 있었어. 매봉산이 배추머리 하고 내 앞에 짠 하고 나타난 듯했지. '올라오길 잘했지?'라고 물으면서 말이야. 시원한 매봉산 바람에 배추의 머릿결도 흔들렸어. 풍성한 게 유난히도 탐스럽다 싶었어.


정상까지는 더 올라가야 했어. 배추 덕분에 마음이 많이 열리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갈팡질팡이었지. 길이 더 좁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겁이 났어. 한 번 들어온 겁은 순식간에 자리를 잡고 똬리를 틀기 시작하더라. 더는 앞으로 가지 못했어. 좁은 길에서 차를 돌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한 땀 한 땀씩 바퀴를 틀어 방향을 바꿨지. 내려오는 산길은 조금 더 조심스러웠어. 그래서 속도를 줄이고 거의 기어 내려오듯 했던 것 같아. 등산은 무슨! 나는 돌아온 숙소 앞에서 오는 내내 흘린 땀을 손으로 닦으며 속으로 웃었어. 주제 파악 한 번 제대로 했네 싶더라.


태백에 온 후 며칠 만에 처음으로 숙소를 벗어났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었지만 코앞에 있는 정상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돌아온 건 내내 마음에 걸렸어. 조금만 더 갔으면 됐는데 왜 돌아왔을까. 그때 어렵사리 차를 돌릴 게 아니라 위로 달려야 했는데 말이야. 덧붙여, 끝없이 펼쳐진 고랭지 배추밭까지 눈앞에 아른거렸어. 매봉산이 배추 머릿결을 흔들며 생각이 계속 들 땐 일단 해 보라며 나를 부추기는 듯했지. 다시 가지 않고는 잊히지 않을 자태였어.


다음 날 다시 출발했어. 갈까 말까 고민 따윈 하지 않았지. 한 번 올라갔던 산이라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도 들지 않았어. 한결 마음이 가볍더라고. 역시 뭐든 해보는 게 맞는구나 싶더라. 마주 오는 차들을 볼 때마다 여전히 떨렸지만 한편으론 신도 났어. 배운 운전 매너를 써먹을 수 있는 장이었으니까 말이야. 양보를 주고받으면서 운전하는 게 산길 운전의 매력인 것 같아. 길이 고르지 않아서 느끼는 불안감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공유하는 느낌이거든. 나는 이럴 때마다 성선설을 믿게 돼. 착한 흐름이 길 따라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나도 덩달아 착하게 운전했어. 힘든 상황에서 인간의 이기심보다 이타심을 볼 수 있는 건 참 감사한 일이었어.


정상에서 다시 본 풍력발전기는 여전히 여유롭게 돌아가고 있었어. 느긋하고 힘차게 매봉산에서 부는 산바람의 흐름을 맞추는 것 같았지. 해가 질 때가 되니 산과 어울려 풍경이 장관이더라. 처음엔 분명 멀대 같아 보일 뿐이었는데 구면이라고 이렇게 달리 봐도 되는 건가. 내 변덕에 애써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싱거운 건 나였더라고. 매력적인 매봉산을 보며 역시 뭐든 자세히 봐야 제대로 알 수 있구나 싶었어.


해발 1300m나 되는 산 정상에 이렇게도 넓은 배추밭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멀리서 풍력발전기가 도는 것만 보며 지나치고도 나는 매봉산을 봤다고 알은체하지 않았을까. 멀대 같은 풍력발전기 몇 대가 있더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겠지. 끝까지 가서 다행이야. 덕분에 매봉산에 대해 싱겁지 않게 말할 수 있어 좋아. 산은 걷든 운전을 하든 경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 걸 알겠어. 숨은 보석이 곳곳에 있거든. 앞으로 매봉산을 등산할 기회가 온다면 두말 않고 잡을 생각이야. 제법 용감해진 것 같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니까. 그러니 갈까 말까 고민하지 말고 태백 다른 곳도 일단 돌아다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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