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한달살이 : 자유
땅에 맨발을 디뎠어. 첫 느낌은 서늘했지. 푹푹 찌는 한여름에 웬 떡이냐 싶더라. 대낮에 길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서 있는 내 발이 여전히 어색했지만 일단 시원한 게 최고였으니 합격이었어. 그리고 한 발자국이 어렵지 두 발자국은 쉽더라고. 나는 몇 번 주춤거리다 본격적으로 걷기 위해 시동을 걸었어. 그리고 갈 수 있을 만큼만 가보자고 마음먹었지. 출발 지점에는 신발 몇 켤레가 놓여 있었어. 길에는 나 말고도 다른 맨발이 존재한다는 뜻이었어. '동지들 조금만 기다리시오. 곧 가겠소.' 갑자기 만날 사람이 생긴 나는 비장한 얼굴로 신세계를 향해 씩씩하게 앞으로 나갔어.
"아얏! 앗, 따가워!"
몇 걸음 못 가 나는 까치발을 해야 했어. 신발 위에서 걸을 땐 존재조차 몰랐던 자잘한 돌멩이들이 맨발 아래에서 뾰족거리고 있었거든. 나는 그제야 땅이 제대로 보였어. 편편하고 고른 땅인 줄만 알았는데 그 위에는 제법 다양한 것들이 있더라고. 맨발로 계속 갈 수 있을까. 발바닥에 박힌 작은 돌멩이들을 털어내며 길을 봤어. 제일 많은 게 돌멩이었지. 당황스러웠지만 다행히 그들의 뾰족함이 내 발을 뚫을 정도는 아닌 듯했어. 걷다 보면 적응이 될 것도 같았지. 자동으로 지압도 되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출발했으면 무라도 뽑고 돌아오자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
내 걸음은 자동으로 사뿐거렸어. 돌멩이와 최대한 부드럽게 만나려는 발바닥의 생존 본능이었지. 뭘 밟을지 몰라 앞은 보지 못하고 아래만 살폈어. 길 위에는 또 다른 세상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더라. 개미는 죽은 지렁이와 매미 곁에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 위에는 나비가 꽃을 찾고 있었어. 돌멩이 다음으로 존재감이 드러나는 건 낙엽이었어. 한여름이라 마냥 푸른 잎만 보고 다녔는데 땅에는 떨어져 색이 바랜 것들이 꽤 있더라고. 용기를 내어 낙엽을 맨발로 밟아봤어. 아직 여름이라 물기를 머금고 있어 바스락거리는 맛은 나지 않았지. 가을 길은 또 다르겠구나 싶어 자연이 새삼스러웠어.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고 있는 게 맞았어. 몇 번 왔던 길이었거든. 그땐 울창한 숲과 매미 소리만 보고 들었었나 봐. 오늘 본 길은 분명 새로운 곳이었어. 나는 개미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살짝 머뭇거렸어. 숨어 있던 세상을 발견한 기쁨도 있었지만 여태 위만 보고 밑은 보지 않았던 내 시선이 느껴져서 말이야. 밟힐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위는 늘 경계하면서 내가 밟는 세상 따윈 관심이 없었다는 걸 먼저 인정해야 했어. 다행히 어리숙한 맨발은 깊이 반성할 때 천천히 쓰기 딱 좋더라.
할 수만 있다면 돌멩이와 낙엽 외엔 아무것도 밟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개미도 죽은 매미도 없는 땅만을 찾아 요리조리 발을 디디며 다녔지. 뭉툭한 바늘 같은 돌멩이가 주는 지압도 제법 즐겼고. 발도 이미 신발과 동행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듯했어. 더운 날이었지만 땅은 시원했고 바람은 살랑거렸어. 뜨거운 햇살도 나뭇잎이 절반은 가려줬지. 나뭇잎 모양의 그늘이 길 위에 드리워져 있었어. 반짝거리는 게 물 위에 윤슬을 보는 듯하더라고. 왕복 50분 정도 되는 길이었어. 구경할 게 많아 심심할 틈이 없었어.
기다렸던 동지들도 간간이 지나갔어.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려다 검은 마스크에 검은 모자까지 뒤집어쓴 채 햇빛을 차단하고 있는 내가 무섭게 느껴질까 봐 자제를 했지. 나는 경험 많은 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어. 돌멩이 위에서 빨리 걸을 수 있는 경지는 처음부터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느리지만 동지들이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어. 그들을 지나칠 때마다 라디오 소리, 음악 소리, 말소리가 들렸어. 나무 위에서 들리는 매미 소리는 아래에서 내는 어떤 소리와도 잘 어울렸지. 나는 무음이라 다양한 화음들이 더 잘 들렸어.
길을 다 돈 후 다시 출발점으로 와 발을 씻었어.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데 어찌나 시원하던지 내 입에서 걸쭉한 아저씨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발은 별로 더럽지 않았는데 시원해서 더 열심히 씻었어. 한여름의 시원함이었지. 맨발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다시 만난 신발 앞에서 제법 툴툴거렸어. 기어 다닐 때를 제외하고 신발에서 벗어나보지 못했던 발이잖아. 오랜만의 해방감이 이해는 되더라고. 물기가 다 마를 때까지 발가락 열 개를 신나게 꼼지락거렸어. 그리고 다시 오겠다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겨우 신발을 신었지. 상큼하고 기분 좋은 맨발 산책이었어.